인권갈등 사우디 내달 방문, 무역분쟁 중국 관세 인하
조 바이든 대통령이 그간 인권 문제로 대립해온 사우디아라비아의 원유 증산을 독려하기 위해 직접 중동으로 향한다. 또 중국산 소비재에 대한 관세를 낮추는 등 미중 무역 분쟁에서도 한발 물러설 방침이다.
철석같이 믿었던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금리 인상에도 소비자물가가 8.6%까지 솟구치면서 정치적 위기에 내몰리자 자신이 내세운 ‘가치 외교’ 원칙마저 접고 물가 잡기 총력전에 나선 것이다. 11월 중간선거에서 패색이 짙어진 민주당도 정유사를 겨냥한 ‘징벌세’까지 꺼내 들었지만 물가를 통제할 근본 처방이 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진단이 나온다.
백악관은 바이든 대통령이 다음달 13~16일 사우디와 이스라엘 등 중동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14일 공식 발표했다. 바이든 대통령 스스로 국제사회에서 ‘왕따’시키겠다고 공언했던 사우디의 실권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와도 만날 예정이다. 카린 장피에르 백악관 대변인은 이날 “대통령은 거의 80년 동안 미국과 전략적 파트너였던 사우디 방문을 고대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의 사우디 방문이 주목되는 것은 사우디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암살 사건의 배후로 지목하며 압박해온 사우디의 실세 왕세자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모양새가 됐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대러 제재의 여파로 인한 유가 폭등이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패권을 쥔 사우디를 달래기 위해 중동행을 택한 배경이 됐다.
정치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이란을 등에 업은 후티반군의 위협을 받는 사우디는 여전히 미국의 확고한 안보 우산이 필요하고 미국은 사우디를 통한 석유 시장 안정을 노리고 있다”면서 “역사적으로 두 나라의 관계는 항상 어느 정도 거래에 기반을 뒀다”고 진단했다. 양측이 이번 만남에서 그간의 앙금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하겠지만 결국 전략적 거래를 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순방 중 사우디에서 열리는 걸프협력회의(GCC) 확대 회의에도 참석해 러시아에 맞서기 위한 원유 증산을 중동 산유국들에 촉구할 것으로 전해졌다.
아울러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 내 인플레이션 압력을 조금이라도 완화하기 위해 중국에서 수입되는 소비재 중 일부 품목에 대한 고율(25%) 관세도 인하할 방침이다. 악시오스는 바이든 대통령이 조만간 미 무역대표부(USTR)에 중국산 소비재를 무역법 301조상 관세 대상에서 제외하는 공식 절차를 시작하라고 명령할 것이라고 전했다. USTR 내부 반발도 상당했지만 고물가로 사면초가인 바이든 대통령이 관세 인하 쪽으로 기운 것으로 보인다. 대중국 관세 인하는 그간 중국에 맞서 글로벌 공급망까지 재편하려던 바이든 정부의 대외 정책 기조를 감안할 때 상당히 부담되는 조치라고 뉴욕타임스(NYT)는 분석했다.
글로벌 인플레이션의 또 다른 원인인 식량문제 해소에도 나섰다. 바이든 대통령은 14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미국노동총연맹(AFL-CIO) 회의 연설에서 우크라이나 해안에 묶인 곡물을 유럽으로 유통하기 위해 폴란드를 포함한 우크라이나 국경에 임시 저장고를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러시아 해군이 흑해를 봉쇄 중인 가운데 수천만 톤의 우크라이나 곡물을 육로로 국경까지 옮기고 이를 다시 발트 3국 등에서 해상으로 수출할 방법을 찾겠다는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에게 보조를 맞추듯 여당인 민주당은 유가를 잡기 위해 ‘정유사 때리기’에 나섰다. 유가 폭등으로 10% 이상의 이윤을 올리고 있는 석유회사에 추가로 21%의 징벌적 연방 세금을 물리는 방안이 골자로 공화당의 반대로 통과 가능성은 높지 않으나 법안을 통해 여론전에 나서는 셈이다.
이처럼 바이든 대통령과 민주당이 물가 잡기에 사활을 거는 것은 치솟는 인플레이션이 그만큼 정치적 압박 요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고물가로 가계 부담이 급증하고 증시마저 약세장에 진입하면서 민심은 빠르게 현 정권에서 돌아서고 있다. 민주당은 11월 중간선거에서 상하원을 모두 빼앗길 위기에 처했고 지지율이 연일 곤두박질치는 바이든 대통령은 인플레이션 악몽 속에 연임에 실패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마저 제기된다고 CNN은 진단했다. 특히 15일 발표된 5월 소매판매가 -0.3%로 5개월 만에 하락 전환하는 등 스태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커진 것도 바이든 대통령에게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정치적 사활을 건 총력전에도 불구하고 인플레이션 완화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회의론이 바이든 정부 내부에서도 적지 않다. OPEC이 이미 증산에 돌입하고 미국 정부가 대규모 전략비축유를 방출했음에도 유가는 고공 행진을 멈출 줄 모르며 공급망 병목과 수요 증가에 따른 인플레이션 압박도 여전하기 때문이다. 중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 인하의 필요성을 주장해온 재닛 옐런 연방 재무장관조차 “솔직히 관세 정책이 인플레이션의 만병통치약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워싱턴=윤홍우 특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