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우크라 사태로 글로벌 공급망 훼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우리가 지난 30년간 경험한 세계화의 종말을 고하고 있다.” 10조 달러가 넘는 자산을 굴리는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래리 핑크 최고경영자(CEO)가 지난달 24일 주주들에 보낸 서한에서 우크라이나 사태의 영향을 이같이 평가했다. 러시아 증권 투자를 중단하며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진영의 대러시아 ‘경제 전쟁’에 동참한 핑크 CEO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영향이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수십 년간 나타날 것”이라고 우려했다.
■세계화 종말론까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도발이 불러온 신냉전의 먹구름이 세계화의 앞길에도 짙게 드리우고 있다. 2010년대 후반 당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운 보호무역주의로 세계화를 후퇴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는데 이번에는 푸틴 대통령이 그 책임의 중심에 섰다.
핑크 CEO의 말처럼 세계화의 종말은 아니더라도 세계 각국의 경제·금융망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고 필요 자원에 대한 상호 의존도가 높은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사태는 세계화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 서방 진영이 경제 제재 수위를 높이며 러시아와의 경제적 분리에 박차를 가하고 있어서다.
미국은 유럽연합(EU) 등과 손잡고 러시아 은행들을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스위프트) 결제망에서 퇴출해 자금 거래에 타격을 입힌 데 이어 러시아산 원유와 천연가스 수입을 금지했다. 첨단 제품과 부품의 대러시아 수출 통제도 하는 미국은 무역 관계에서 러시아에 대한 최혜국 대우도 박탈할 계획이다. 관련 법안이 하원을 통과하고 현재 상원 표결을 남겨놓고 있다. EU와 일본도 미국과 발을 맞추기로 했다.
러시아는 서방 제재에 맞서 수출 제한 카드를 꺼내 들고 EU 회원국 등 자국에 비우호적인 국가에 천연가스를 팔 때 러시아 통화인 루블화만 받겠다고 하는 등 러시아산 원자재 의존도가 높은 국가를 압박하고 있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국제 공급망이 마비되며 국가 간 교역이 차질을 빚고, 일부 국가가 해외 생산기지를 자국으로 불러들여 자체 공급망 구축에 나서면서 탈세계화 경향이 이미 나타났고, 우크라이나 사태가 이를 부추기고 있다.
■미·중 대립구도로 가나
세계 경제에서 러시아가 차지하는 비중은 국내총생산(GDP) 기준 1.7%로 다른 주요 국가와 비교해 작은 편이지만 서방과의 맞불 제재가 더해지면서 각국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반인들도 쉽게 체감하는 것은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한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악화다.
러시아는 세계 2위의 원유 생산국이자 수출국이다. 또 천연가스는 1위, 석탄은 3위 수출국이다. 러시아는 반도체 촉매 재료에 쓰이는 팔라듐, 휘발유 등의 원료로 사용되는 나프타 등 다른 원자재의 주요 공급국이기도 하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밀 등 주요 곡물의 대표적 수출국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450개 이상의 글로벌 기업이 러시아 사업의 철수나 축소에 나섰다. 러시아는 외국 기업이 사업을 접을 경우 이를 몰수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어 서방과의 대립각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코로나19 대유행과 우크라이나 전쟁은 세계 경제의 탈동조화(디커플링) 현상을 짙게 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주요 2개국(G2)인 미국과 중국 두 축을 중심으로 세계 경제 진영이 나뉜다는 것이다. 중국이 대러시아 제재에 반대하고, 미국은 중국의 영향력 확대와 중·러의 밀착을 경계하는 것이 이런 관측에 힘을 싣는다.
뉴욕타임스는 지난달 22일 세계 경제 규모의 20%를 차지하는 중국과 러시아가 우호국들과 ‘경제 연맹’을 만들 가능성을 제기했다. 러시아가 천연가스 대금의 루블화 결제를 요구하고, 중국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수입하는 원유 대금의 일부를 위안화를 결제하는 방안을 협의하는 것은 기축통화인 미국 달러화의 지배력을 약화하려는 시도로도 해석된다. 신냉전 시대 국제 공급망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주도권 싸움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