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정찰기가 시카고 상공을 날아다니는 모습이 포착됐다.” 지난 8월14일 시카고 지역 매체 ‘WGN9’의 헤드라인은 이랬다. 미국 방공망에 구멍이 뚫렸다는 우려를 자아내는, 심지어 음모론의 냄새마저 풍기게 하는 뉴스였다. 미확인비행물체(UFO)라면 모를까, 최대의 군사적 위협 국가인 러시아의 정찰기가 미국의 하늘을 누비고 다녔다니. 그러나 시사주간지 타임에 따르면, 이는 실제 상황이었다. 지난 8월11일 러시아 정찰기 Tu-154M이 미국 영공에 진입한 뒤 오하이오주 데이튼을 거쳐 북서쪽의 시카고, 미니애폴리스로 향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미군은 이를 멈추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미국과 러시아를 포함해 총 34개국이 가입해 있는 항공자유화조약, 이른바 ‘열린 하늘 조약(Open Skies Treaty)’에 따른 비행이었기 때문이다.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완전히 정상적인’ 활동이었다는 말이다.
글로벌 호크 2만2,000km 비행
지상의 30cm짜리 물체도 식별
한국도 올해말 1호기 들여와
러시아 Su-70 8월 초 첫 비행
AI 운항에 반경 4,000km 정찰
유도미사일·탄약 탑재해 타격도
트럼프‘열린하늘조약’탈퇴 추진
“러시아 감시 포기”비판도
1992년 체결돼 2002년 1월 발효된 항공자유화조약은 회원국 간 자유로운 비무장 공중정찰을 허용하고 있다. 각국의 군사력 보유 현황과 군사활동, 군축협정 이행상황 등에 대한 국제적 감시를 가능케 함으로써 지나친 군비 경쟁을 막겠다는 취지다.
물론 100% 자유롭게 무제한적인 정찰 비행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상대국 측에 미리 통보를 해 줘야 하고, 사전 합의된 스케줄로 비행해야 하며, 수집한 정보도 공유한다. 이런 식이면 무슨 실익이 있겠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 해도 격추될 위험 없이 타국 군사 동향을 탐지할 기회를 마다할 국가는 없다. 조약 발효 후 미·러는 물론, 영국 프랑스 독일 폴란드 우크라이나 등 회원국들의 감시 비행 횟수는 무려 1,200회에 달한다.
■글로벌 호크, 현존 무인정찰기의 최고봉
정보의 힘이 갈수록 커지는 현대전에 있어 ‘스파이 비행기(spy plane)’라고도 불리는 정찰기(reconnaissance aircraft)의 중요성을 굳이 강조할 필요는 없다. 물론 냉전 시대의 해체, 군사위성의 발달 등으로 과거에 비해선 정찰기에 의존할 이유가 줄어든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 미국과 러시아 등 세계 각국은 지금도 최첨단 정찰기를 곳곳에서 운용하며 신형 정찰기 개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원하는 시간과 장소를 콕 집어서 비밀리에 적의 동향을 정밀 감시하는 데에는 여전히 정찰기가 가장 유용하다는 이유에서다.
이 분야에서 가장 앞서가는 나라는 역시 미국. 본격적인 시작은 ‘첩보기의 고전’ U-2기였다. 1995년 실전 배치된 이 정찰기는 소련 전투기가 도달할 수 없는 20km 이상의 상공을 비행하며 소련의 군사정보를 캐내 정보전에 있어서 미국이 압도적 우위를 점하도록 해 줬다. 물론 1960년 소련 지대공 미사일에 의해 U-2기가 격추되는 사건이 일어났지만, 미국은 5년 후 최대 속도가 마하 3.3인 초고속 정찰기 SR-71(블랙버드)을 다시 선보이며 대응했다.
현재 미국의 주력 정찰기는 바로 RQ-4 ‘글로벌 호크’ 기종이다. 1998년 초도 비행을 마치고 실전 배치된 이 정찰기는 ‘고고도 무인정찰기 시대’의 선두주자다. 무엇보다 무인기(드론)라는 점에서, 적 영공에 진입했다가 격추되더라도 조종사 인명 피해가 전혀 없다.
‘U-2기 대체’라는 개발 목적에서 보듯, 20km 상공에서 35~40시간 동안 2만2,000km 이상을 비행할 수 있고, 첨단 영상레이더와 전자광학·적외선 감시장비 등으로 지상의 30cm(약 1피트)짜리 물체도 식별이 가능하다. 예컨대 ‘30cm 해상도 모드(가로·세로가 각각 30cm인 물체가 1개 점으로 표시)’를 쓰면 24시간 동안 7,600평방km 면적에 대해 사진 1,900장을 촬영하고, ‘1m 해상도 모드’에선 13만8,000평방km 지역을 훑을 수 있다. 한국도 지난 2014년 제작사인 노스럽 그러먼과 4대 도입 계약을 체결해 올해 말 1호기 인도를 앞둔, 현존하는 무인정찰기의 ‘최고봉’이다.
다만 지난 6월 20일 이란에 의해 격추된 미군 드론이 바로 이 RQ-4를 해상 작전용으로 개조한 MQ-4C ‘트리톤’이라는 사실은 미국에 숙제를 안겨 줬다. U-2기 격추 때와 비슷한 상황에 봉착한 셈이다. 미 록히드마틴이 SR-71(1998년 퇴역)의 후속으로 ‘2020년 시험 비행’이라는 목표하에 개발 중인 ‘SR-72’ 정찰기가 관심을 끄는 이유다. 최대 속도가 마하 6에 달할 것으로 관측되는데, 미 안보전문매체 내셔널인터레스트는 “개발자들은 ‘속도가 새로운 스텔스’라고 주장한다”면서 “감시·정찰뿐 아니라, 공격 기능도 수행하는 ‘스텔스 폭격기’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베일 벗은 러 무인스텔스 정찰기 ‘Su-70’
러시아 군의 최신형 정찰기는 투폴레프의 Tu-214ON이 대표적이다. 일반 제트여객기 Tu-214를 개조한 모델로, 2011년 처녀 비행 후 실전 배치됐다. 최고 비행 고도는 12.1km, 최대 비행거리는 6,500km에 각각 달한다. 순항 속도는 시속 810~850km로, 동급 기종은 아니지만 미국의 글로벌호크(시속 640㎞)보다 빠르다. AK-112 디지털 공중카메라 2대와 AK-111 지형 카메라, AK-84ON 파노라마 카메라 등이 장착돼 고해상도 항공사진을 촬영할 수 있다는 게 강점이다. 미국은 당초 Tu-214ON에 대해 “디지털 장비 성능이 러시아 당국이 밝힌 것보다 더 뛰어나다”는 이유를 들어 항공자유화조약에 따른 미 영공 진입을 불허했다. 하지만 결국 지난해 9월 이를 승인했고, 올해 4월 미 남서부 정찰 비행 임무를 수행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진짜 야심작은 따로 있다. 지난 8월 초 첫 비행에 성공한 무인 스텔스 정찰기 수호이(Su)-70이다. 미 공군의 B-2 스텔스 폭격기를 연상케 하는 납작한 외형인 Su-70은 시속 1,000km(마하 0.81)의 속도로 반경 4,000km의 범위를 정찰할 수 있다.
인공지능(AI)에 의해 자동 운항하며, ‘옥호트니크’(사냥꾼)라는 별칭답게 유도미사일과 탄약을 탑재하고 있어 타격 임무 수행도 가능하다. 특히 지난달 27일에는 러시아 스텔스 전투기 Su-57과 나란히 비행하는 동영상도 공개됐는데, 러시아매체 RT는 “두 항공기는 무시무시한 한 팀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Su-70이 Su-57의 레이더 범위를 확장시켜, Su-57로선 적의 방공망 구역에 들어가지 않고도 공격 타깃을 정밀 조준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이처럼 정찰 분야에서도 미·러 간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항공자유화조약에서 탈퇴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CNN 방송 등 미 언론들이 지난 8일 보도했다. 이에 대해 연방 상·하원 외교위원회 등은 국무부와 국방부 등에 항의 서한을 보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겐 또 다른 선물이 될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CNN은 “지난 8월 미·러 중거리핵전력조약(INF) 탈퇴 이후 정부가 또 국제조약을 포기하려 한다”며 “러시아에 대한 미군의 공중감시 능력에 상당한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러시아 영공 감시 임무를 스스로 내던짐으로써, 냉전 이후 유지돼 온 국제사회의 질서를 또다시 허물어 버리고 있다는 얘기다. <김정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