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냐의 마라토너 엘리우드 킵초게(35)는‘인간 한계’로 여겨지는 마라톤‘2시간 장벽’을 가장 먼저 깰 것으로 기대를 모으는 선수다. 그는 지난해 9월 베를린마라톤에서 2시간1분39초의 세계기록을 작성했다. 2시간 기록 돌파를 위해서는 딱 100초만 줄이면 된다. 42.195km를 2시간에 주파하려면 100m를 17초06에 달려야 한다. 보통 사람의 전력 질주에 해당하는 속도로 40km 이상 달려야 하는 셈이다. 사실 킵초게는 2017년 5월 글로벌 스포츠 용품업체 나이키의 ‘브레이킹2’(2시간을 깬다는 뜻) 프로젝트에서 2시간25초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워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적이 있다. 나이키는‘브레이킹2’를 위해 킵초게를 비롯해 하프마라톤 세계기록 보유자인 제르세나이 타데세(37·에리트레아), 가장 권위 있는 대회로 꼽히는 보스턴 마라톤에서 두 번이나 우승한 렐리사 데시사(29·에티오피아) 등 3명의 선수를 선발했다. 또 엔지니어, 디자이너, 생물역학, 스포츠심리학, 소재개발, 의학 등 다양한 분야의 세계적인 전문가들로 팀을 구성했다.
경기 장소는 레이스에 가장 적합한 평지라는 이탈리아 밀라노 근처 몬차의 포뮬러 원 경기장. 30명의 페이스메이커를 선발해 6명씩 교대로 3명의 선수 옆에서 끝까지 달리게 했다. 바람의 저항까지 고려해 페이스메이커들을 화살 모양의 삼각 편대로 달리게 하고 그 뒤에 3명의 선수가 바짝 붙어 레이스를 펼쳤다. 스쿠터를 탄 스태프들이 마라토너와 같은 속도로 달리며 2.4km마다 특수 제작된 탄수화물 보충액을 전달했다.
이렇게 완벽에 가까운 환경에서 킵초게는 2시간25초, 타데세는 2시간6분51초, 데시사는 2시간14분10초를 기록했다. 도로가 아닌 포뮬러 원 서킷에서 경기를 펼친 점, 페이스메이커의 국제 기준을 어긴 점 때문에 킵초게 기록은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으로부터 공식 기록으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그는 ‘적합한 환경’이라면 인간도 2시간 이내에 마라톤 레이스를 마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 줬다.
킵초게가 믿기 힘든 기록을 달성할 수 있었던 또 다른 비결 중 하나는 바로 운동화다. 그가 신고 달린 운동화는 나이키가 제작한 ‘베이퍼플라이 엘리트’인데 온갖 첨단 기술이 적용됐다.
운동화의 바닥은 바닥창인 아웃솔(outsole), 중창인 미드솔(midsole), 깔창이라 부르는 인솔(insole)로 구성돼 있는데 ‘베이퍼플라이’의 중창에는 스펀지처럼 가늘고 뻣뻣한 탄소섬유판이 박혀 있다. 나이키에 따르면 이 탄소섬유판이 새총의 고무줄, 투석기의 지렛대, 스프링과 비슷한 역할을 해 기존 운동화에 비해 착지 후 내딛는 힘을 13% 정도 높여 준다. 뉴욕타임스는 스포츠 과학자인 로스 터커의 말을 인용해 “이 신발을 신은 선수는 (평지보다) 1~1.5% 경사진 내리막길을 줄곧 뛰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비유했다.
바닥창은 미끄러짐을 방지하는 게 최우선이라 보통 고무재질로 만들기 때문에 운동화에 들어가는 첨단 기능은 중창에 집중된다. 한국신발피혁연구원 문광섭 박사는 “첨단 운동화는 곧 중창의 기능 싸움이라 보면 된다”고 말했다.
‘베이퍼플라이’의 중창에는 ‘줌X’란 나이키 자체 개발 폼이 사용됐다. 이 폼 덕분에 추진력이 85%까지 높아진다는 게 나이키 측 설명이다. 중창 소재로는 보통 EVA(에틸렌초산비닐 공중합체), PU(폴리우레탄), 파이론 등이 사용된다. 문 박사는 “각각의 소재가 얼마나 들어가는지 비율을 조절하고 어떤 성분을 첨가하는지가 중창 연구의 핵심”이라고 했다.
나이키는 ‘줌X’를 어떻게 만드는지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있다. 미국의 한 러닝전문지에 ‘줌X’가 폴리우레탄을 주성분으로 만들어졌다는 짧은 언급만 있을 뿐이다.
운동화의 앞쪽은 추진력, 뒤쪽은 충격흡수를 담당한다. 오프셋이 높을수록 압력이 앞으로 쏠리는 만큼 추진력은 강해지지만 뒤꿈치는 들려 있어 충격흡수가 어렵다. 오프셋이 높은 신발 중 하나가 여성들이 많이 신는 힐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베이퍼플라이의 오프셋은 9mm로 강한 추진력을 낼 수 있다. 대신 뒷부분은 활처럼 크게 휘어져 있는 형태로 제작돼 발이 받는 충격을 최소화했다. 달릴 때는 뒤꿈치가 땅에 먼저 닿게 되는데 평평할 때보다 굴곡이 있을 때 접지 면적이 넓어 충격흡수가 더 잘 되는 원리다. 문 박사는 “발 앞쪽이 들려 있을 때의 경사 각도를 고려해 스택의 높이를 얼마로 할 것인지 책정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베이퍼플라이의 스택은 21mm인데, 나이키 측은 “다각도의 실험을 통해 발이 받는 충격을 최소화하고 회복이 가장 빠른 스택의 높이를 정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첨단 기술이 집약된 ‘베이퍼플라이’는 2016년 말 출시된 직후 ‘기술도핑’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기술도핑은 스포츠에서 도구나 장비가 기량 향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현상을 말하는 것으로 전신 수영복이 대표적인 예다.
수영용품업체 스피도는 1998년 폴리우레탄을 이용해 물의 저항을 줄인 전신 수영복을 개발했고 이 수영복을 입은 선수들이 늘면서 2008년에만 108개의 세계기록이 쏟아졌다. 결국 전신 수영복은 2010년 퇴출당했다.
‘베이퍼플라이’에 대해서도 IAAF가 기술도핑에 해당하는지 조사할 거란 전망이 나왔지만 문제는 없는 것으로 결론 났다. 나이키는 “베이퍼플라이는 IAAF의 모든 제품 관련 규정을 준수하고 있으며 별도의 검사나 승인을 필요로 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킵초게는 오는 10월 오스트리아 빈의 프라터 파크에서 다시 한번 2시간 벽에 도전한다. 영국의 글로벌 화학 업체 이네오스가 ‘1:59 챌린지’ 프로젝트를 통해 킵초게를 후원한다.
킵초게는 지난 15일 영국 BBC와의 인터뷰에서 “기록을 깰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며 “이번 도전은 인류 최초의 달 착륙과 같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나이키의 ‘브레이킹2’ 처럼 IAAF로부터 공식 기록으로 인정받지 못할 수 있지만 그는 “상관없다. 나는 세계기록이 아니라 역사적 유산을 남기고 싶은 것이다. 이번 도전의 가장 큰 메시지는 75억 인구에 인간의 한계는 없다는 것을 일깨우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오는 10월 인류 역사에 또 하나의 이정표가 세워질지 모른다. 물론 최첨단 운동화와 함께.
<윤태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