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지역인 카슈미르 싸고
1947년부터 끊임없는 국경분쟁
인도 1974년 핵무기 실험 성공
파키스탄도“질 수 없다”핵보유
양국, 군축 대신 군비경쟁 몰두
올 2월에도 폭탄테러 현재진행형
2차대전이 끝난 1945년에 인도, 즉 과거의 무굴은 영국의 오랜 식민 지배를 벗어났다. 무굴은 동시기의 오스만투르크, 페르시아와 함께 이슬람을 대표하는 국가였다. 전성기 때 서쪽의 아프가니스탄에서 동쪽의 미얀마까지 통치한 무굴의 영토에는 여러 민족이 살았다. 이들의 이해관계는 전적으로 일치하지 않았다. 가령 힌두 대금업자들은 몽골과 페르시아에서 유래한 무굴 왕가를 무너트리려고 애썼다. 이자 수취를 금지하고 지분 취득 방식의 금융만 인정하는 이슬람을 약화시켜야 자신들이 힘을 쥘 수 있어서였다. 예상할 수 있듯이 이들은 처음에는 영국의 인도 지배를 환영했다. 독립과 함께 인도 내부의 다양한 목소리가 표출되었다. 영국령 인도는 네 조각으로 나뉘어졌다. 가장 큰 조각은 현재의 인도였다. 그 다음으로 큰 조각은 인도의 서쪽과 동쪽을 가진 파키스탄이었다. 지방 혹은 나라를 뜻하는 스탄이라는 페르시아어 접미사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파키스탄은 이슬람 국가였다. 동파키스탄보다 더 동쪽 지역은 버마로 독립했다. 불교신자가 대부분인 버마, 즉 현재의 미얀마는 인도와 역사를 공유하지 않았다. 현재의 스리랑카에 해당하는 인도양의 섬 실론 또한 별개의 국가로 독립했다.
■옛 무굴의 독립, 분쟁의 서막 되다
파키스탄으로 분리된 지역은 크게 보면 서쪽의 펀자브와 동쪽의 벵갈로 대변되었다. 이슬람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소수긴 하지만 이들 지역에 당연히 있었다. 마찬가지로 인도로 독립한 지역에도 적지 않은 이슬람신자가 살았다. 최소 수십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다수의 폭력에 목숨을 잃었다. 그 과정에서 600만 명 이상의 이슬람교도가 서파키스탄으로, 400만 명 이상의 힌두교도와 시크교도가 인도로 서로 도망쳤다.
1947년에 벌어진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의 1차전쟁은 카슈미르 지역의 쟁탈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서파키스탄과 인도, 그리고 중국 사이에 끼어있는 카슈미르의 인구 대부분은 이슬람이었다. 파키스탄은 당연히 카슈미르를 자신의 일부로 여겼지만 지역의 마하라자(대왕(大王)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였던 하리 싱은 독립국으로 남기를 원했다.
파키스탄의 민병대를 상대할 방법이 없자 하리 싱은 인도에게 지역을 넘겼다. 이후 인도와 파키스탄은 서로 정규군을 카슈미르에 파견해 1948년 말까지 전쟁을 벌였다. 카슈미르를 나눠 갖기 위해 벌인 이 전쟁에서 두 나라는 각각 수천 명의 사상자를 냈다.
1965년에 벌어진 2차전쟁도 카슈미르가 원인이었다. 1962년 인도는 중국과 한 달 동안 전쟁을 치러 완패를 당했다. 향후 인도군의 현대화 노력이 예상되자 파키스탄은 그렇게 되기 전에 인도령 카슈미르를 뺏으려고 게릴라 부대를 침투시켰다.
현지인 반란으로 위장하려는 의도였지만 인도가 보기에 상황은 너무나 뻔했다. 인도군은 자국령 카슈미르에서 반격하면서 동시에 서파키스탄에게도 공격을 퍼부었다. 17일 간의 전쟁이 끝난 후 인도가 획득한 영토는 파키스탄이 획득한 영토의 세 배가 넘었다.
파키스탄 자체에 내재된 모순 때문에 벌어진 전쟁도 있었다. 서로 1,500㎞ 이상 떨어진 데다가 인도에 가로막힌 펀자브와 벵갈은 이슬람을 믿는다는 점 외에는 사실 공통점이 적었다. 서파키스탄에 의해 2류 취급을 당하던 동파키스탄은 무장투쟁 끝에 1971년 급기야 독립을 선언했다. 같은 벵갈이어도 서벵갈은 힌두신자가 주류인 인도 영토였다. 서벵갈의 인도군이 동파키스탄 사태에 개입하자 서파키스탄군은 인도의 동펀자브를 전면 침공하면서 3차전쟁이 벌어졌다. 결과는 파키스탄의 사실상 완패였다. 동벵갈은 결국 방글라데시로 독립했고, 파키스탄은 해군의 2분의 1, 육군의 3분의 1, 공군의 4분의 1을 잃었다.
1999년에 벌어진 4차전쟁도 2차전쟁과 비슷한 양상이었다. 현지 민병대로 위장한 파키스탄 부대가 인도령 카슈미르의 도시 카길에서 준동하자 인도군은 3만 명 병력을 동원해 반격했다. 석 달 간 치러진 전쟁 끝에 파키스탄군은 철수하고 인도군이 카길을 회복했다. 이외에도 이루 셀 수도 없는 국경 분쟁을 두 나라는 치러왔다.
■탐욕·공포에 사로잡힌 군비 경쟁
시작부터 꼬인 인도와 파키스탄의 적대적 관계를 푸는 일은 쉽지 않았다. 두 나라가 처한 공통의 상황 때문이었다. 먼저 인도 입장에서 보면 군사력 강화는 당연한 결정이었다. 파키스탄이 취할 군비 증강과 군축이라는 두 시나리오 모두에서 인도의 군비 증대는 인도에게 이익을 가져왔다. 보다 구체적으로, 파키스탄이 군대를 강화하는데 인도가 군축을 시도한다면 언제 있을지 모를 전쟁에서 질 가능성이 높았다. 군축보다는 같이 군비를 강화하는 쪽이 유리했다. 파키스탄이 군축을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같이 군축하는 쪽보다는 군대를 강화해 분쟁에서 승리하는 게 더 유리했다. 이러니 인도가 군비를 늘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파키스탄이 처한 상황도 인도와 다르지 않았다. 인도가 무슨 결정을 하든 파키스탄 입장에서 군비 증대는 군축보다 유리했다. 마치 거울로 비춘 인도의 입장과 같았다. 파키스탄과 인도의 군사력 강화 결정은 결과적으로 잦은 무력 분쟁을 낳았다.
흥미롭게도 두 나라 사이에는 공통적으로 보다 나은 한 가지 상황이 존재했다. 둘 다 군비 증대 대신 군축을 택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반복되는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줄 터였다. 설혹 전쟁이 일어나도 해도 물리적인 손실을 줄일 수 있었다. 게다가 줄인 군사비를 경제 성장과 국민 복지를 위해 쓸 수도 있었다.
문제는 이를 강제할 수단이 없다는 점이었다. 설혹 두 나라가 선의를 갖고 군축을 동시에 수행한다고 해도 그 상태는 불안정했다. 상대가 군축하는 동안 내가 군비를 늘리면 결과적으로 나는 적지 않은 이익을 취할 수 있었다.
반대로 내가 군비를 줄여도 상대가 뒤통수를 치면 최악의 결과가 벌어졌다. 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을 가져오는 두 가지 요인, 즉 탐욕과 공포는 동시에 두 나라 사이의 끊임없는 군비 증대와 전쟁의 원인이기도 했다.
■핵대결로 번진 출구없는 분쟁
두 나라 사이의 대립은 핵무기의 존재 때문에도 위태롭다. 영국의 지배가 지긋지긋했던 인도는 독립할 때부터 핵무기 보유를 희망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지배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20년 넘도록 꾸준하게 준비한 인도는 1974년 ‘웃고 있는 부처’라는 암호명의 핵무기 시험에 성공했다.
불구대천의 원수 인도가 핵무기를 가지자 파키스탄의 마음이 급해졌다. 1965년 2차 인도-파키스탄전쟁 때 파키스탄 총리 줄피카르 알리 부토는 “인도가 핵폭탄을 가지면, 천년 동안 풀과 잎사귀만 먹을지언정 우리도 우리만의 핵폭탄을 가질 것이다. 기독교인이 갖고 있고 유태인도 갖고 있고, 힌두인도 가지는데, 왜 이슬람인은 안 되는가”하고 선언했다. 파키스탄의 공식적인 핵무기 개발은 1971년 3차전쟁, 즉 방글라데시독립전쟁에서 진 직후인 1972년에 시작됐다. 파키스탄은 1998년에 공식적인 핵무기 시험에 성공했다. 비공식적인 시험은 이미 1984년에 완료했다.
두 나라의 군사적 대결을 해소하는 이론적 방법은 간단했다. 군비 증대를 택했을 때 그 이상의 불이익을 보게 만들면 되었다. 그렇게 되면 상대가 어떤 선택을 하든 군축을 하는 쪽이 언제나 더 유리해졌다. 즉 두 나라의 손익 구조가 바뀌면서 군사력을 강화할 경제적 이유가 사라지는 셈이었다. 그렇게 되면 군축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위 해결 방법은 이론적으로는 완벽해도 실제로는 작동하기 쉽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그 이상의 불이익’을 보게 만들 현실적 수단이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 일을 담당할 유일한 합법적 존재는 국제기구겠지만 국제기구에게 그런 권한을 넘겨줄 국가는 흔하지 않았다. 설혹 있다고 해도 언제든지 약속을 깨고 자신의 길을 가지 말란 법도 없었다.
2019년 2월14일 파키스탄 민병대의 자살차량폭탄 공격으로 인도군 40명이 죽은 후 재개된 양국의 무력 분쟁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
지난 15일 인도 독립기념일 행사에서 카슈미르 경찰관들이 퍼레이드에 참여하고 있다.
지난 21일 파키스탄 수도 카라치에서 한 여성이 반 인도 구호를 외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