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고 열풍 타고 대패삼겹살 유행
과거회귀적 힙스터들 열광
1980~90년대 분위기 복원한
크리스탈 접시ㆍ멜라민 그릇까지
삼겹살 고정관념도 깨며 차별화
볼살ㆍ두항정ㆍ다릿살 등 선보여
요즘 패션은 과거를 소환한다. 1994년 가수 박진영이 ‘날 떠나지마’를 불렀을 때 입었던 비닐 바지는 2018년 샤넬의 부츠와 가방, 모자가 되어 런웨이에 돌아왔다.
브랜드를 숨길수록 세련됐던 얼마 전까지의 유행을 부정하기라도 하듯 ‘인간 명품’을 만들어주는 모노그램과 큼직한 로고도 올해 트렌드의 큰 맥락을 차지한다. 심지어는 해외 패셔니스타들의 곱슬곱슬한 머리를 붙들고 있는 ‘곱창 밴드’까지 흔히 목격된다. 20세기를 떠나 보낸 후 촌스러움의 상징이 되었던 그것이 되살아나다니! 1970년대 초부터 2000년까지, 지난 세기말의 모든 것이 런웨이와 리얼웨이에 부활해 들썩이고 있다.
21세기 서울의 지형도도 과거회귀적이다. 요즘 가장 뜨거운 동네는 그 어느 곳도 아닌 을지로다. 요즘 힙스터들은 을지로, 종로, 퇴계로 안쪽 철공소 골목, 인쇄 공장, 골뱅이 골목 곳곳에 숨어들기를 즐긴다. 이곳에서 간혹 80년대를 박제해놓은 것 같은 카페며 식당, 술집을 볼 수 있는데, 이런 곳들 중 상당수는 실제로 80년대부터 있었던 곳들이 아니다. 황학동 같은 골동품 시장이나 어딘가 철거현장에서 주워온 것 같은 물건들로 감쪽같이 만들어낸 ‘레플리카’다.
유행은 이렇게 돌고 돈다. 과거는 조금씩 다듬어져 더 나은 현재가 된다. 경험해본 세대에겐 향수를 소환하고 경험해보지 않은 세대에게는 설레는 현재로 다가온다.
냉동 삼겹살, 향수를 소환하다
외식 문화에도 복고풍 아이템이 등장했다. 과거 대패 삼겹살, 냉동 삼겹살이라 불리던 음식이 ‘냉삼’이라는 귀여운(?) 애칭으로 돌아왔다. 요즘 냉삼은 돈 없는 대학생들이 주로 먹던 돌돌 말린 대패 삼겹살까지는 아니고, 꽝꽝 언 고기를 그나마 먹을 만하게 만들기 위해 5㎜ 이하의 얇은 두께로 잘게 잘라 굽던 것과 비슷하다.
냉삼은 80, 90년대의 분위기를 복원한 인테리어와 짝을 이뤄 밀레니얼 세대들에게 ‘힙스러운’ 코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몇 해전부터 서울 용산구 ‘나리의 집’엔 이전과 다른 부류의 손님들이 더 많아졌다. 한남동의 세련된 카페에 더 잘 어울리는 옷매무새의 이들이 낡고 오래된 식당에서 냉삼을 굽는다.
새삼스러운 냉삼 복고 열풍은 단지 문화 코드의 복구 이상의 의미가 있다. 정육 전문가 최정락 실장은 이렇게 말한다. “첫 번째 이유는 ‘추억의 음식’이라는 것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최근까지 삼겹살 트렌드는 두꺼운 통고기를 식당 직원이 구워주는 것이었는데 이 형태는 기술을 가진 직원이 투입되어야 하고, 굽는 데 시간도 많이 소요되거든요.”
금방 구워서 먹을 수 있는 냉삼은 이제까지 대세였던 두꺼운 삼겹살에 대항해 등장했다. 최저임금 인상 등 인건비 부담이 증가함에 따라 손님이 직접 구워먹는 형태의 식당을 외식업계에서 고민한 결과가 현재의 냉삼 열풍으로 나타났다는 것.
냉삼 시대를 이끈 식당들
냉삼 시대를 소환한 첫 주자로 미식가들 사이에서 꼽히는 곳은 대삼식당이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 서울본부세관 건너편의 어두침침한 골목에 들어선 이 식당은 요즘도 밤마다 대기 줄이 늘어선다. 빈티지한 일러스트로 그려진 돼지 간판이나 스테인리스 냉면그릇에 툭툭 담겨 나오는 찬이 시간을 뛰어 넘어 추억을 불러낸다.
그 다음으로 등장한 곳이 서울 용산구 보광동의 ‘잠수교집’. 냉삼 시대를 대폭발시켰다는 평을 받는 이곳의 독특한 스타일을 모방한 ‘짝퉁’ 냉삼집 제보가 전국 곳곳에서 사장님 귀로 들어오고 있을 정도다. 한남 뉴타운4구역, 오랜 재개발 정체로 80년대 드라마 세트 같은 분위기를 간직한 이곳은 손때 묻은 정경까지 더해져 문 열기 1시간 전부터 줄이 생기기 시작할 정도로 인기다. 울긋불긋한 꽃이 그려진 예스러운 스타일의 ‘오봉’에 찬을 담아 내는 잠수교집의 스타일링은 동네 분위기와 함께 복고 정서를 한껏 끌어올린다. 곧 해방촌에 2호점도 문을 열 예정이다.
잠수교집이 생기고 곧이어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랭돈’이 생겨 주변 직장인들뿐 아니라 냉삼 힙스터들을 끌어들였다. ‘주류 일절’이라는 사어를 쓴 고색창연한 간판이나, 흰 점이 박힌 녹색 멜라민 그릇이 복고 분위기를 물씬 낸다. 냉삼은 주물 불판 위에 쿠킹 포일을 한 겹 덮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곳은 일반 불판을 사용한다.
지난주 정식으로 문을 연 서울 마포구 합정동 ‘행진’ 또한 서울의 새로운 냉삼 거점이다. 알루미늄으로 마감한 중고 간판(잘 보면 원래 붙어 있던 상호도 읽힌다)을 구해와 80년대 서체로 상호를 얹은 간판이며 알루미늄 새시로 된 미닫이문, 니스칠을 한 나무벽과 간유리 등. 인테리어를 업으로 하던 이곳 사장님이 경력을 십분 활용해 감쪽같이 80년대 ‘테마파크’를 완성했다. 잠수교집이 오봉이라면, 여기선 호프집에서 흔히 보던 묵직한 크리스탈 소재의 ‘마른안주 접시’에 담긴 반찬이 복고 스타일링의 정점을 찍는다.
오봉, 멜라민 그릇… ”80년대 테마파크”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식당의 기본은 맛이다. 싸구려 맛없는 고기로 인식되는 냉삼은 어떻게 유행의 중심으로 돌아올 수 있었을까. 중국 식재료 중 동두부라는 것이 있다. 말 그대로 얼린 두부인데, 일반 두부의 꽉 찬 식감과 달리 이 동두부는 독특한 식감을 갖고 있다. 속에 구멍이 나있어 씹으면 질깃하게 뭉쳐 있는 듯한 식감을 준다.
냉동 삼겹살도 얼리고 녹이는 과정에서 두부와 같은 변화가 일어난다. 얼면서 고기 안의 수분이 팽창해 세포벽이 파괴되며 일어나는 현상이다. 업계에서는 ‘드롭’이라고 부른다. 보관 상태가 좋지 않아 냉동과 해동을 반복해도 이런 질감이 날 수 있고, 기본적으로 냉동 기간이 길면 이 현상이 나타난다. 이 상태의 삼겹살을 구우면 기름 섞인 누런 물이 질질 흘러나오고, 돼지 기름맛 수세미를 씹는 것 같은 불쾌함이 느껴진다. 이는 그간 냉동 삼겹살이 갖고 있던 오명의 결정적 원인이었다. 냉장육으로 팔기 어려운 품질의 고기를 얼렸던 탓도 있고, 정말로 오랜 기간 냉동한 고기를 써서 어쩔 수 없었던 탓도 있다.
세월을 살아남은 나리의 집 등 냉삼 노포들이 남달랐던 점은 신선한 고품질의 냉장육을 급냉시켜 그날 그날 육절기로 썰어 내고, 질감이 지켜지는 기한 내에 소비했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냉삼집들 역시 대부분은 그 원리를 이해하고 있는 듯 하다. 냉삼 원판 불변의 법칙. 맛없는 고기를 얼려봐야, 얇게 썰어봐야, 맛 없는 고기는 맛 없는 고기다.
앞서 과거는 조금씩 다듬어져 더 나은 현재가 된다고 했다. 냉삼 시대를 이끄는 이곳 식당들 역시 뭐라도 하나씩 더 나은 현재를 만들고 있다. 고기에서 차별화를 꾀하기도 한다. 삼겹살 단일메뉴만 취급하는 잠수교집선 제주 백돼지만을 고집하고 있고 제주 돼지 비계 특유의 쫀쫀함을 강조한다. 행진도 특수부위인 돈차돌은 100% 제주산 돼지고기만을 사용한다.
냉삼은 꼭 삼겹살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도 깨지고 있다. 행진의 돈차돌은 돼지 머리 부근의 대망살을 롤 형태로 얼린 것이다. 볼살의 살코기, 두항정의 마블링, 향긋하고 탱탱한 비계까지, 세 가지 맛과 식감이 한 입에서 난다. 소의 고급 부위인 차돌박이 이름을 딸 만하다. 랭돈에선 앞다리살과 목살을 동그랗게 말아 새로운 비주얼을 만들어냈다. 이곳의 앞다리살은 가게 이름을 따 랭돈이라고 메뉴 명을 붙였다. 퍽퍽할 수 있어 특제 소스에 찍어서 파절임 등 채소를 싸먹는 고기다.
돌아온 냉삼 덕분에 누군가는 변변치 않았던 젊은 날의 추억을 떠올리고, 누군가는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한 신선한 동경을 품고 설레는 시간여행을 떠난다. 포일 씌운 불판에 휙 구운 얇은 삼겹살, 거기에 파절임 듬뿍, 흥건한 돼지 기름에 구운 김치까지 크게 한 입 먹으면 너의 과거와 나의 현재는 다르지 않은 것이 된다. <이해림 객원기자>
서울 용산구 보광동 잠수교집의 상차림. 고색창연한 쟁반에 찬을 담아 내준다. 냉동 삼겹살에 미나리, 꽈리고추, 마늘쫑을 구워 곁들여 먹는다. <이가은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