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크기는 높이와 비례하지 않는다. 질량의 크기가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김인육의 시 ‘사랑의 물리학’) 것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봄 마중 나섰다가 끝없이 이어지는 찬란한 바다 풍경에 중독됐다. 생각보다 고된 산행에 몇 번이고 포기하고 싶었지만, 갈수록 새롭게 펼쳐지는 바다에 이끌려 무거운 발걸음은 어느새 가파른 바위를 오르고 있었다. 봄 빛깔이 서서히 오르는 통영 사량도에 다녀왔다.
사량도(蛇梁島)는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중간 지점, 통영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섬이다. 조선초기까지 박도라고 불렀으나, 이곳에 설치한 수군 진지를 ‘사량만호진’이라 칭하면서 사량진 혹은 사량으로 일컫게 됐다. ‘사랑’이 넘쳐날 것 같은 간지러운 발음과는 달리, ‘사량’이라는 지명은 뱀과 관련이 있다. 섬의 형상이 뱀처럼 길다거나 뱀이 많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지만, 그보다는 크기가 비슷한 위아래 두 개의 섬(이곳에서는 웃사량도, 아랫사량도로 부른다) 사이를 흐르는 바닷물길이 뱀처럼 가늘고 구불구불해 붙은 이름이다. 섬 주민들은 이 사량해협을 강에 빗대 동강이라고도 한다. 물길의 폭이 좁기도 하지만 색깔이 그만큼 예쁘다는 말이다.
사량도는 1,400여명이 거주하는 비교적 큰 섬으로 배편도 많은 편이다. 통영의 가오치항, 사천의 삼천포항, 고성군 용암포에서 여객선이 운항한다. 이왕 섬 여행에 나섰으면 첫 배를 타기를 권한다. 오전 7시에 가오치항을 출항하기 때문에 선상에서 일출을 맞는다. 붉게 물든 양식장과 새벽 조업에 나선 어선 뒤편으로 한려해상국립공원의 크고 작은 섬들이 겹쳐져 바다 위에 한 폭의 산수화를 그린다.
섬에서 묵을 계획이 아니라면 첫 배를 이용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다른 섬 여행과 달리 사량도에 가는 주된 목적이 산행이기 때문이다. 섬이라고 만만히 볼 게 아니다. 시간이 많이 걸린다. 웃사량도의 지리산은 2002년 산림청에서 지정한 100대 명산의 하나다. 100대 명산 중 배를 타고 가야 하는 섬 안의 산은 신안 흑산면 홍도의 깃대봉과 이곳 지리산, 둘뿐이다.
사량도 지리산(智異山)은 한라산을 제외하고 남한에서 가장 높은 지리산과 이름이 같다. 섬 남측의 돈지마을, 북측의 내지마을 사이에 있기 때문에 지리산이라 부른다고도 하는데, 더 정확하게는 지리망산(智異望山)이다. 시계가 좋은 날이면 봉우리 능선에서 육지의 지리산이 보이기 때문이다. 해발 398m로 높은 편이 아니지만, 산행은 육지 지리산의 웬만한 봉우리 오르는 것 못지않게 힘들다. 약 8km에 이르는 등산로 거의 전 구간이 바위산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5시간은 잡아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어느 한 구간 쉬운 곳이 없고, 어디 한 구석 버릴 데 없는 옹골찬 풍경을 자랑한다.
섬에서 산행은 육지에서와 달리 사실상 바닥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해발 고도가 실제 올라야 하는 높이다. 사량도 산행은 섬의 서남쪽 돈지마을에서 시작하는 게 보통이지만, 조금이라도 힘을 아끼기 위해 섬 끝자락 ‘수우도전망대’에서 출발했다. 해발 160m 지점으로 순환버스로 갈 수 있다.
중턱에서 시작한 셈이지만 길은 쉽지 않았다. 경사가 완만한 흙 길을 조금 지나자 바로 바위 능선으로 이어진다. 지리산 바위는 슬레이트처럼 납작하고 잘게 쪼개지는 점판암이 큰 덩어리를 이루고 있다. 표면이 둥그스름한 곡선이 아니라 뾰족하고 날카롭다. 가파른 경사를 오르내릴 때는 이 돌부리나 나뭇가지를 잡아야 하기 때문에 등산용 스틱은 번거롭고 장갑이 필수다.
시작부터 힘은 좀 들지만 발아래 펼쳐지는 풍경에 감탄사를 연발한다. 초록빛 가득한 바다에 하얀 포말을 그리며 포구로 드나드는 어선들, 신기루인 듯 옅은 바다안개에 휩싸인 섬들과 그 위로 거칠 것 없이 이어진 푸른 하늘, 거기에 산바람이라도 스치면 작은 땀구멍까지 뻥 뚫린다. 살짝 초록이 감도는 산 아래에 빨간 지붕 파란 지붕의 민가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돈지마을은 동화 속 풍경이다. 등산로 어느 모퉁이에 앉아도 산과 섬과 바다와 하늘이 모두 내 것이다.
보통 산행 코스는 능선에 닿으면 그때부터 완만하게 오르락내리락하기 마련이고 힘든 구간에서 얼추 벗어났다고 여기게 되는데, 이곳 등산로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지리산 정상에서 불모산(달바위), 가마봉, 옥녀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오르고 내리는 폭이 크고 험하고 아찔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내리막이 나타나도 전혀 반갑지 않다. 특히 섬의 최고봉 달바위(400m)에 이르는 길은 뾰족한 바위에 한 줄로 철제 안전대만 설치해 놓아 다리가 후들거린다. 가마봉에서 내려가는 계단은 수직으로 툭 떨어져 굴뚝 꼭대기에서 내려가는 듯 아찔하다. 실수하지 않을까 오줌보가 급격히 수축되는 느낌이다. 이런 사정을 감안해 이 구간에는 ‘우회로’가 따로 있다. 웬만큼 산행에 자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조금 아쉽더라도 돌아가는 편이 현명하다.
사실 끝없이 이어지는 급경사와 험한 바위 길에 몇 번이고 중간에서 내려가고 싶은 맘이 들었지만, 그때마다 새로운 바다와 마을이 펼쳐지고,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발걸음은 어느새 한숨지으며 바라보던 봉우리를 오르고 있었다. 가장 하이라이트는 3개의 봉우리를 연결한 가마봉의 출렁다리. 까마득한 낭떠러지 아래로 섬 북측 대항해수욕장의 하얀 모래사장이 눈부시고, 크고 작은 어선은 푸른 물감에 우유를 풀어 놓은 듯한 동강의 물살을 가른다. 정면 오른편 아랫사량도와 연결하는 다리 아래로는 여객선이 포물선을 그리며 섬을 돌아나간다. 눈길 가는 어느 한 곳 그림이 아닌 곳이 없다.
마지막 옥녀봉에서 여객선터미널이 있는 진촌마을로 내려올 때는 안도감과 아쉬움에 한 계단 내디딜 때마다 다리에 힘이 풀렸는데,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은 리본에 “푸훗”하고 웃음이 나고 말았다. ‘갈수록 괜차뉴’, 어느 충청도(일 것으로 추정되는) 산악회의 표현이 사량도 산행을 한마디로 정리하고 있었다.
[사량도 여행 수첩]
●통영 도산면 가오치항에서 사량도 중심지 사량여객터미널까지는 40분이 걸린다. 고성 용암포와 삼천포항에서 섬 북측 내지항까지는 각각 20분, 40분이 소요된다. 각 노선에 하루 5~7회 정기 카페리가 운항하고 주말과 휴일에는 횟수가 추가된다. 편도 승선권으로 판매하기 때문에 출항과 입항을 다른 곳으로 해도 상관없다.
●등산만 할 계획이면 사량여객터미널에서 배 도착 시간에 맞춰 2시간마다 운행하는 섬 순환버스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섬에서 숙박하거나 일주도로를 여행할 계획이면 차를 가지고 가는 것이 편리하다.
●지리산은 악산이기 때문에 등산화와 장갑을 꼭 착용해야 한다. 종주하려면 5시간을 잡아야 하지만 일부 구간만 걸을 수도 있다. 수우도전망대~지리산~돈지마을 코스를 선택하거나 면사무소~옥녀봉~가마봉(출렁다리) 코스만 왕복해도 사량도의 절경을 즐기는 데 부족함이 없다. <사량도(통영)=최흥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