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과 상처로
아예 등지고 사는
가족들 늘어나
성격차이가 심한 부부는 이혼이라는 수단으로 관계를 단절한다. 그러나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부모 자식간의 관계다.
부모와 자식간에는 이혼처럼 공식적으로 관계를 단절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대신 서로 보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부모와 자식간 아예 등을 지고 사는 현상이 최근 늘고 있다. 최근 영국의 에지 힐 대학 연구팀이 학술지 ‘가족 이론과 리뷰’(Journal of Family Theory & Review)에 얼마전부터 가슴 아픈 사회 현상으로 떠 오르고 있는 가족 관계 단절을 주제로 한 논문을 발표했다.
하루 아침에 일어난 사건이 계기가 될 수는 있지만 가족간 관계가 단절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호주의 사회복지사 카일 아길라스 박사는 2016년 자신이 쓴 저서 ‘가족 별거’(Family Estrangement)에서 가족 관계 단절은 수년 내지 수십년이 걸린다고 했다. 가족간의 불신과 상처가 쌓여서 관계 단절로 이어지려면 그만큼 오랜 세월이 걸린다는 설명이다.
지난해 6월 유타 주립대 연구팀이 발표한 보고서에는 오랜 기간에 걸쳐 부모와 연락을 끊고 지내는 성인 자녀들의 슬픈 사례가 여러건 실렸다.
48세인 한 여성은 무려 33년간 아버지와 연락을 끊고 지내면서 아버지의 말년과 장례식조차 참석을 거부했다. 부모와 그저 껍데기 불과한 관계만 유지하며 지내는 자녀도 있다.
21세의 한 남성은 대학 진학 뒤 부모와 떨어져 살며 어머니에게만 전화 또는 문자 메세지로만 드문 드문 연락을 하고 지낸다고 했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아버지에게는 전혀 연락을 하지 않으며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 사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심정을 털어놓기까지 했다.
크리스티나 샤프 유타 주립대 교수는 ‘관계 단절’은 지속적인 과정이라고 단정했다. 처음에는 관계가 소원해지다가 수년, 수십년간 치유없이 시간이 흐르면 결국 완전한 관계 단절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2015년 호주의 연구팀이 적어도 한 자녀로부터 관계 단절을 당한 부모 2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부모들이 느끼는 단절의 이유는 크게 3가지로 나타났다.
자녀가 부모 대신 배우자나 이성 친구를 선택할 때, 자녀가 부모의 잘못된 행동을 문책하려는 의도가 있을 때, 또는 부모와 가치관이 다르다고 판단할 때 등이 부모와 관계를 끊게 만드는 주된 이유였다.
일부 부모들은 부부간 불화, 이혼, 건강 악화 등의 이유를 참지 못해 자녀가 연락을 끊기도 했다고 답했다.
한 부모는 간식 거리로 촉발된 고부간의 불화로 아들과 연락이 끊기기도 했다.
시어머니인 이 부모는 며느리에게 가족 모임에 특정 간식을 준비해 오라고 준비했는데 며느리가 고의적으로 다른 음식을 가져온 것을 자신을 무시하는 행위로 여기게 됐다. 이후 며느리의 행동 하나 하나가 반감을 불러 일으켰고 결국 아들 부부와 7년간 얼굴을 보지 않게 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자녀들도 나름대로 부모와 연락을 하지 못하게 된 속사정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호주 사회복지사 연구팀이 성인 자녀 2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자녀들의 부모와 관계 단절 사유는 크게 3가지로 나뉘었다.
부모로부터 정신적으로 또는 육체적으로 학대를 당했다고 판단하거나 부모로부터 배신감을 느낀 경우, 그리고 어려서 부모로부터 잘못된 육아를 경험한 자녀들은 부모와 등을 지고 사는 비율이 높았다.
2014년 약 2,000명의 영국 성인을 대상으로 실시된 조사에서 약 8%가 가족과 관계를 끊고 지내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를 영국 전체 인구와 비교하면 약 500만명에 해당되는 인구수다. <준 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