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물 뜨끈하면서
팍팍 떠 먹을 수 있는 온도
맛집들 대부분 70도에 맞춰
곰탕의 완성은 밥과 토렴
식은 밥에 뜨거운 국물 수차례
갓 지은 밥처럼 탱글탱글
북 서쪽으로부터 건조하고 찬 바람이 밀려온다. 이럴 때 떠오르는 음식, 상투적이기 그지 없는 뜨끈한 국물.
그 중에도 고기 국물. 몸 속 ‘내연기관’까지 뜨겁게 덥혀 움츠린 어깨를 다시금 펴게 하는 곰탕 한 그릇. 점심에 곰탕 한 그릇 할 까, 생각이 절로 드는 날씨다. 한겨울 곰탕집 문을 열고 들어서면 몸이 사르르 녹는다. 칼날 같은 추위와 메마른 습도에 시달리던 몸은 곰탕집 안의 후끈한 열기를 만나 거기서부터 위안의 시작이 된다. 단백질과 지방이 녹아든 국물은 그 자체로 체온 유지에 급급하던 몸 속 내연기관을 다시 활활 불타오르게 하는 요긴한 에너지원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제시하는 곰탕의 표준 칼로리는 700g 한 그릇에 579.62kcal로, 여기에 밥 한 공기까지 보태지니 겨울철 쓰기 좋은 장작임이 틀림 없다.
후끈함의 적정 온도는
앗 뜨거워! 그런데 그 뜨끈함의 적정온도를 두고 말이 많다. 우리는 뚝배기에 가득 담겨 나와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국물 요리에 매우 익숙하며, 아예 테이블 위에서 국물 요리를 펄펄 끓여가며 그것을 ‘시원하게’ 훌훌 떠먹기도 한다. 너무 뜨거운 음식의 위악은 잘 알려져 있다. 짠맛을 덜 느끼게 해 과도한 나트륨을 섭취하게 한다. 혀와 입천장을 데는 것은 미미하더라도 엄연히 화상이다.
그렇다면 미지근한 온도가 국물 음식의 최적치일까. 그렇지도 않다. 뜨겁긴 뜨거워야 한다. 지혜로운 곰탕 전문점들은 뜨거움과 미지근함 사이, 적정 온도를 정해두고 있다. 곰탕의 성지이자 표준으로 꼽히는 서울 명동 하동관 본점에서 갓 나온 곰탕 국물은 섭씨 76도였다. 채 썬 파를 얹고 밥을 뒤섞고 나서는 70도로 내려가 딱 좋게 훌훌 먹을 수 있는 온도가 됐다. 후후 불거나 조심할 필요 없이 숟가락으로 팍팍 떠먹을 수 있는 온도다. 여기에 깍두기 국물을 부으면 온도는 더 내려간다. 하동관의 이 절묘한 온도를 두고 단골들 사이에선 우스갯소리로 “빨리 먹고 나가게 하려고 안 뜨겁게 낸다”는 음모론이 잊을 만하면 부상하곤 한다. 그러나 손님의 회전이야 식당의 염려이고, 객이야 그것이 딱 먹기 좋은 온도를 배려한 것이라는 의도 그 자체에만 주목해도 충분하다. 아래서 소개할 솜씨 좋은 신흥 곰탕집 역시 대개 70도대의 온도를 정해두고 곰탕을 낸다.
곰탕이 100도 가까운 뜨거운 온도로 나온다 해도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유기나 그 비슷한 재질의 스테인리스 식기에 담겨 나오는 곰탕은 열 전도율이 낮은 뚝배기에 담긴 것에 비해 빠르게 온도를 잃고, 하동관에서 그러했듯 송송 썬 파를 넣거나 깍두기 국물을 부으면 국물 온도는 계단식으로 툭툭 내려간다. 더구나 요즘처럼 식사 전 기도마냥 사진부터 찍고 수저를 드는 때엔 펄펄 끓어 나온 국물이 차라리 더 맞을지도 모른다.
밥의 예술, 토렴의 지혜
곰탕의 완성은 밥이고, 토렴이다. 보온 기능이 있는 전기 밥솥이 없던 때에는 곰탕의 밥이 무조건 토렴한 것이어야 했다. 찬밥을 뜨거운 국물에 말아 먹어서는 온도 손실이 너무나 크다. 그 손실의 결과는 면을 건져먹고 식은 라면 국물에 찬밥을 넣었을 때 어떤 온도가 되는지 연상해 보면 될 것이다. 그래서 개발된 기술이 토렴이다. 밥이 차게 식었지만 뜨거운 국물을 부었다 따라내는 일을 여러 번 반복해 밥의 온도를 덥히고, 국물도 뜨거운 채로 먹을 수 있게 했다.
찬밥의 문제는 단지 온도만의 문제가 아니다. 밥엔 다량의 전분이 있는데, 쌀알일 때 단단한 전분조직은 물과 열을 만나 쫀쫀한 젤리처럼 변한다. 말랑말랑하면서도 찰기 있는 상태로 쌀을 변화시켜 소화되기 쉽게, 그리고 맛도 좋게 하는 것이 밥 짓는 의의다. 문제는 갓 한 밥이 식으면서 일어난다. 온도가 낮아지면 밥의 전분은 다시 뻣뻣한 상태로 변해 맛도 없고 먹기에도 좋지 않다. 이때 수분을 더하고 온도를 높이면 다시 전분을 말랑말랑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 현대 조리 과학의 원리로 밝혀진 현상이다. 토렴은 어디까지나 경험 원리에서 나온 선조의 고급 기술이라 할 수 있다.
전자레인지로 밥을 데우고 국물을 부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토렴을 지속한다. 이 시대에도 토렴이 이어지는 것은 토렴한 밥의 고유한 특성 때문이다. 뜨거운 밥에 뜨거운 국물을 붓는 것만으로는 토렴한 것처럼 탱글탱글한 상태의 밥이 되지 않는다. 국에 밥을 말았을 때처럼, 퉁퉁 붓고 흐들흐들하게 풀어질 뿐이다. 밥이 죽으로 가는 중간 단계다. 식힌 밥을 이용해 토렴을 하면 맑은 곰탕 국물 안에서도 밥이 갓 지은 밥에 가까운 탄성과 동시에 부드러움까지 갖추게 된다. 아무리 신중히 토렴을 해도 소량의 전분이 풀려 나와 국물이 탁해지지만, 그것은 공평한 ‘기브앤테이크’의 결과로 받아들여야 한다.
곰탕 재료는 전통적으로 양지 같은 소의 살코기와 벌집양, 홍창, 곱창과 때로 지라를 비롯한 각종 소화기와 소량의 뼈다. 적은 양의 지방도 육수에 흘러나오지만, 단백질로 똘똘 뭉친 육수 그 자체가 곰탕의 본질이다. 단백질은 곧 고소한 감칠맛이다. 또한 ‘육향’이라는 한 마디로 정의되는 고소한 아로마도 풍긴다. 그리하여 풍부한 맛과 향을 가진 곰탕은 다소 염도가 덜해도 먹는 데에 불편함은 없다. 나트륨 과잉 섭취가 걱정된다면 소금간을 싱겁게 해도 그럭저럭 괜찮다는 이야기다. 살짝 짭짤하다 싶은 적정한 염도, 그러니까 0.9~1% 정도의 염도로 간을 하면 달고 고소하고 국물 맛이 확 살아나 더 맛있게 된다. 바닷물의 염도가 3.5%이고 흔히 쓰는 양조간장과 진간장의 염도는 16%다.
/ 글 이해림 객원기자·사진 이가은(Afro studio)
서울 마포구 현석동‘곰탕 수육 전문’의 곰탕 토렴. 탱글탱글한 밥 사이로 고기 국물이 뜨끈하게 파고든다.
곰탕 명가‘하동관’의 곰탕. 한국일보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