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메밀꽃·분홍 백일홍·노란…
누가 가을 단풍만 화려하다 하더냐
뭉쳐야 뜬다고 했던가. 꽃도 그렇다. 한 송이도 좋지만 역시 꽃송이는 군락을 이울 때 더욱 황홀하다.
높아진 하늘만큼 가을이 가깝다. 하늘과 가장 가까운 땅, ‘해피700’ 평창에 가을꽃이 풍성하다. 바람 한 점 스칠 때마다 하늘거린다. 산허리마다, 강 자락마다 흩뿌려진 평창의 꽃밭 따라 가을 여행을 떠났다.
팝콘 터지듯, 봉평 산허리 메밀꽃 가득
봉평의 산허리는 지금 온통 메밀꽃이 흐드러져 있다. 마침 5일이 보름이니 이효석이 ‘메밀꽃 필 무렵’에서 말한 대로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메밀 밭은 영동고속도로 장평IC에서 시작해 봉평면소재지를 지나 이효석문학관에 이르면 절정에 달한다.
조붓한 산길에 작은 산밭이 층층이 이어졌을 산골 밭뙈기는 잇고 붙이기를 거듭하며 산자락이라는 표현이 무색할 만큼 넓어졌다.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는 좁은 길은 면온까지 왕복 4차선 도로로 시원하게 뚫렸다. 품종개량이 어렵다는 메밀도 식량보다는 관상용으로 진화했다. 빳빳한 ‘붉은 대공’은 연초록으로 통통히 살이 올랐고, 소금을 뿌린 듯하다는 꽃밭도 팝콘이 터진 것처럼 풍성해졌다. 달빛에 푸르게 젖은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 대신 코스모스와 해바라기가 간간이 섞여 시각적인 효과도 살렸다.
그래도 소설이라기 보다 시에 가까운 서정성은 어쩌지 못한다. 고지대임에도 둥그스름한 능선과 부드러운 산자락에 스민 푸근함은 지금도 여전하다. 장돌뱅이의 애환과 서정은 문학관에서 약 2km 떨어진 ‘이효석 문학의 숲’에 이르면 정점을 찍는다. 동화책을 펼치듯 소설의 주요 대목을 회화적으로 삼삼하게 재현한 공간이다. ‘대화까지는 팔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들판과 산길을 걸어야 한다’는 고단한 여정을 약 30분간 천천히 돌아보게 꾸몄다. 충주집 지나 물레방앗간에 이르면 보라색 벌개미취가 투명한 가을 햇살에 하늘거리고, 아래로 내려오면 노란 곰취 꽃이 어둑한 숲길을 밝힌다. 동이가 물에 빠진 허생원을 부축하는 장면은 작은 연못에 실물모형으로 재현했다. 짧은 산책을 마치고 나오면 검푸른 산 빛과 하얀 메밀꽃이 대조를 이룬다. 봉평에서도 메밀꽃이 가장 풍성한 곳이다.
이효석의 고향이자 소설의 주 무대인 봉평 일대에서 10일까지 ‘효석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문학마당에서는 매일 저녁 1968년 제작한 영화 ‘메밀꽃 필무렵’이 상영되고, 주행사장에서는 하루 종일 다양한 음악공연이 열린다. 나귀나 깡통열차를 타고 메밀꽃밭을 둘러볼 수 있고, 시골인심 가득한 봉평장마당에서는 먹음직스런 메밀요리가 가득하다. 축제가 끝나는 9일과 10일 밤에는 소원 풍등날리기가 예정돼 있다. 4명의 예술인이 폐교를 활용해 만든 무이예술관, 야생화 만발한 허브나라, 사계절 즐길 거리 가득한 휘닉스평창도 인근이다.
이효석문확관에서 문학의 숲에 이르는 산자락 일대가 소금을 뿌려놓은 듯 하얗다. 작은 사진은 평창강변을 눈부시게 장식한 황화 코스모스 군락.
평창강 물들인 백일홍과 황화코스코스
장평IC에서 봉평 반대편으로 이어진 31번 국도는 ‘메밀꽃 필 무렵’의 허생원 일행이 오갔던 대화면과 평창읍으로 이어진다. 군청이 위치한 곳이지만 평창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통행 차량이 적다. 영동고속도로에서 다소 비껴나 있어 동계올림픽 분위기가 오르는 봉평, 진부, 대관령면에 비하면 더욱 한갓지다. 일부 구간에서 확장공사가 진행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왕복 2차선 도로로 평창강을 따라 내려간다.
축제를 위해 포토존도 설치했다.
여유로운 드라이브 코스로 손색이 없지만, 이렇다 할 볼거리가 부족한 이 구간에 몇 해 전부터 꽃 바람이 불었다. 평창군에서 평창강 둔치 일부를 1,000만 송이 백일홍 꽃밭으로 꾸몄기 때문이다. 멕시코 원산으로 가정에서 관상용으로 흔하게 재배하는 백일홍이 언제 한국에 들어왔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분홍과 붉은색이 주를 이루지만 이곳 백일홍 꽃밭엔 흰색과 주홍, 오렌지색 등 다양한 개량종이 섞여있어 알록달록 꽃 천지다. 두상꽃차례(꽃대 끝에 여러 개의 꽃이 머리 모양으로 모여있는 형태) 주변으로 한 겹의 꽃잎을 두른 일반적인 모양 외에, 달리아나 장미처럼 꽃잎이 뭉쳐 풍성한 형태의 백일홍을 볼 수 있다는 것도 이곳의 자랑이다.
6월부터 10월까지 피어 오랫동안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것을 빼면 사실 백일홍 꽃밭을 조성한 뚜렷한 이유가 없지만 무리의 힘은 컸다. SNS로 알려지고 입소문을 타면서 꽃 길만 걷고 싶은 이들이 몰려들었고, 어느덧 축제를 열기까지 이르렀다. 올해 축제는 23일부터 다음달 8일까지 ‘당신의 백일을 축하합니다’라는 주제로 열린다. 백일홍 화관과 꽃반지 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다.
장암산 아패 평창강변의 바위공원.
기묘한 바위 위로 패러글라이딩이 파란 하늘을 선회하고 있다.
백일홍축제장 상류 평창읍내 강변 둔치에는 또 다른 꽃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황화 코스모스’라고도 부르는 노란 코스모스가 강변을 가득 덮고 절정의 가을분위기를 띄운다. 유속이 느린 평창강의 옥색 물빛과 대조를 이뤄 더욱 눈이 부시다. 이곳 역시 특별한 사연 없이 버려진 강 자락을 볼거리로 활용한 아이디어인데, 평창군에서는 백일홍처럼 ‘군락의 힘’을 기대하는 눈치다.
황화 코스코스 꽃밭 바로 옆의 ‘평창바위공원’은 화려함보다 바위만큼 육중한 값어치를 자랑하는 시설이다. 평창군에선 ‘노람뜰 일원에 2~140톤에 이르는 다양한 수석 123개로 조성한 전국 최대 규모의 수석 공원’이라는 정도만 알리고 있다. 거북바위, 두꺼비바위, 선녀바위 등의 이름은 겉모양만 중시한 듯하지만 실제는 지질과 암석의 형성과정을 관찰할 수 있어 학술적 가치가 더 높은 작품들이란다. 캠핑장을 겸하고 있어 젖은 옷을 널어 말리는 야영객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실제 가격을 알면 깜짝 놀랄 수준이다. 군에서는 도난을 우려해 작품명 외에 상세 정보는 알리지 않고 있다. 바위공원 바로 위 깎아지른 절벽 꼭대기는 장암산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이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바람을 탄 패러글라이더가 우아하게 선회하는 모습도 이 즈음 평창의 전형적인 가을 풍경이다.
청옥산 전망대에서는 어디를 둘러봐도 가슴이 탁 트인다.
평창읍에서 멀지 않은 미탄면 청옥산(1,256m)은 가을과 더욱 가깝다. 고랭지 배추를 재배하는 ‘육백마지기’로 더 알려진 곳인데, 지금은 시설하우스 안에 꽃을 재배하는 화훼단지로 탈바꿈하고 있다. 지난해부터는 15기의 풍력발전기가 가동을 시작해 거칠 것 없이 가슴 탁 트이는 바람의 풍경이 그리운 이들에게 딱 좋은 곳이다. 정상까지 포장도로가 나 있어 오르기도 어렵지 않다.
<평창=최흥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