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소재와도 비교 불가한 자연스러움
선글라스 샌달 등 여름 아이템과 찰떡 궁합
무심한 듯 멋스럽고 실용적이기까지
여름, 올해는 유난히 '바구니 든 사람'들이 눈에 많이 띈다. 사실은 바구니가 아니라 ‘라탄백’이다. 라탄(Rattan)은 덥고 건조한 기후에서 자라는 덩굴식물이다. 줄기로 바구니를 짜거나 가구를 만든다. 커다란 라탄백은 휴양지의 상징이다. 리조트 객실과 해변, 수영장을 오갈 때 잡동사니를 담아 다니는 바로 그 가방, 라탄백이 도시로 나왔다. 왜 나왔을까. 이유는 여럿이다. 저렴하고, 질기고, 가볍고, 물에 잘 젖지도 않는다. 무겁고 비싸고 부담스런 레더백, 너도나도 들고 다녀 약간 질리는 에코백대신 올 여름에는 라탄백을 들어보자.
▶ 도시로 나온 ‘라탄백’
라탄백이 패션계에 처음 등장한 건 1950년대다. 세계 경제가 초토화했으니 실용성을 따진 게 당연했다. 영국 가수이자 배우인 제인 버킨은 라탄백 마니아였다. 히피인 그의 1960년대 사진엔 라탄백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드레스를 입고도 라탄백을 들었다.
라탄백을 든 버킨의 모습은 올해 패션 잡지에서 튀어나왔다 해도 믿을 정도로 무심한 듯 시크하다. 버킨에게 라탄백은 그저 멋이 아니었다. 빨래 바구니를 닮은 원통형 라탄백에 아이들 물건을 잔뜩 넣고 다녔다.
그런 버킨에게 영감을 받아 만든 게 유명한 에르메스 버킨백이다. 과시적 소비의 상징인 버킨백이 기저귀 가방에서 나왔다는 것. 하지만 정작 버킨은 터무니없이 비싼 버킨백을 혐오해 라탄백만 들고 다녔다고 한다.
▶ 갈수록 시크함 더해
요즘 라탄백은 알렉사 청, 잔느 다마스, 린드라 메딘 등 패션 철학이 확고한 패셔니스타의 아이템이다.
“나는 바구니처럼 보이는 가방을 들어도 멋있다”는 빛나는 자신감. 올해 봄ㆍ여름 시즌에는 발렌시아가, 로에베, 사카이 등 고가 패션 하우스와 패스트 패션 브랜드가 라탄백을 예년보다 풍성하게 내놓았다.
‘자연의, 자연을 위한, 자연에 의한’이라는 메시지를 담았다. 각 잡힌 모양에 가죽이나 천을 덧붙인 디자인으로 리조트 아이템이라는 편견을 덜어 낸 게 올여름 라탄백의 특징이다. 또 최근에는 라탄백에 가죽, 인조 퍼, 패브릭 같은 장식을 더해 귀엽거나 시크한 멋을 살린다.
라탄보다 부드러운 왕골로 만든 백, 대나무로 만든 뱀부백도 나왔다. 자라, 포에버21 등 한인들도 많이 찾는 브랜드 매장에도 라탄백을 고르는 여성들이 적지않다. 이들은 라탄백에 대해 “가볍고 독특하다. 생각보다 촉감이 좋다. 차가울 줄 알았는데 손에 부드럽게 감긴다.”며 만족스러워 했다.
▶ 미니멀리즘 코디에 딱
라탄백의 인기는 실용성과 저렴한가격때문이다. 명품 브랜드만 고집하지 않겠다면 100달러 미만이면 구입할 수 있다.
저렴한 가격 탓에 가방을 모시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 때도 잘 타지 않아 바닥에 툭 내려 놓아도 마음이 편하다. 물을 흘려도 슥 닦으면 그만이다. 또 다른 라탄백의 장점은 천연 소재인 탓에 자연스러운 미니멀리즘 코디에 어울린다는 것.
한 패션 디자이너는 “라탄백은 선글라스, 플랫 슈즈, 샌들 같은 소품, 청, 린넨 같은 편안하고 부드러운 소재와 잘 맞는다”며 “오래도록 아끼며 들기보다는 ‘지금 이 계절, 이 장소’를 만끽하려 택하는 시즌 아이템”이라고 했다. 하지만 “한껏 차려 입은 정장에 라탄백을 드는 건 너무 나가는 것”이라고도 했다.
라탄백 손잡이에 스카프를 감아 보자. 조금 더 점잖아진다.
라탄백이 하늘하늘한 원피스에만 어울리는 청순 패션 아이템이라는 고정 관념도 버리자. 재킷과도 궁합이 꽤 괜찮다.
▶ 과시적 소비 패션’의 퇴조
라탄백같은 초 실용적인 소재가 인기를 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과시적 소비 패션의 퇴조를 의미한다.
패션을 죽이는 건 나쁜 브랜드 로고다. 그건 패션이 아니라 상표다”(알렉산더 맥퀸), “고급 제품일수록 편해야 한다. 편하지 않으면 고급이 아니다”(코코 샤넬), “여성은 편안한 옷을 입었을 때 가장 섹시하다”(베라 왕), “당신을 스스로 정의하라. 옷 입는 방식으로 표현하려 하는 게 무엇인지 결정하라”(지아니 베르사체)
거장들이 내뱉은 패션 철학이다. 이름도 괴상한 ‘명품’이라는 딱지를 붙여 우리의 지갑을 텅 비게 한 그들이 실은 ‘실용’을 신봉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천박한 ‘명품 신화’는 역시나 날조된 것이었다. 그 비밀을 알아챈 사람들이 최근 몇 년 사이 ‘명품백’을 버리기 시작했다.
내가 편하면, 내 눈에 예뻐 보이면 그만이므로. 손에 넣는 순간 허무감이 밀려드는 허상 같은 가방에 수 천달러를 지불하는 건 너무나 허무하므로. 가방 가격이 품질을 보장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는 것이다.
한 패션 디자이너도 “사람들이 이제서야 뭘 좀 알고 깨어나기 시작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비싼 아이템은 돈이 있으면 누구나 살 수 있지만, 나만의 것, 나의 패션 정체성은 결국 내가 배우고 찾아 나서야 한다”고 했다.
한때 리조트 룩으로만 여기던 라탄백이 가볍고 실용적인 패션 트렌드가 부상하면서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 <이해광 기자>
라탄백은 어느 소재보다 자연스러워 선글라스 샌달 등 여름 아이템과 찰떡 궁합의 코디를 연출하는 것이 강점이다. <이해광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