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케서 아이리스커피까지
열 가해 향 다소 줄었지만
갇혀 있었던 향은 오히려
잔을 맴돌면서 펴져 나와
‘온주’(溫酒)가 생각나는 계절이다. LA의 올 겨울 날씨는 이상하게 더 춥고 눅눅하기만 하다. 시절이 하수상해서 그런지 마음에 불어온 추위는 더 혹독하게만 느껴진다. 술 한잔이 그리운 때, 따뜻한 차처럼 향긋하게 감미롭게 ‘뜨거운 술’은 기분 좋은 취기를 불러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온주의 이모저모를 살펴보자.
▶차처럼 향긋하게 몸을 덥히는 온주
술을 술로서 뜨겁게 마시자? 혹자는 마실 것도 모자란 술을 끓이다니라며 흥분부터 할지 모르겠다. 알코올의 성질을 놓고 보자면 ‘뜨거운 술’이란 가당치 않은 소리인데다 주도에 어긋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단지 온기를 얻기 위해 알코올이 상당량 날아가 버린 취하지 않는 술을 마신다는 모순은 대체 뭘까? 1g당 7cal의 열량을 가진 알코올이 체내에 들어오면서 일어나는 열락은 추위를 잊게 한다. 입에 닿는 온기보다 더 뜨거운 것이 몸 속으로부터의 열기다. 동토 러시아에서 얼음처럼 차갑고 투명한 보드카로 겨울을 나는 것은 지혜로운 전통이다.
뜨거운 술이 가진 효용이란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즐기기 위해 마실 때에 가치를 발한다. 뜨거운 술은 열에 의해 알코올은 다소 잃었을지언정, 잔 안에 온갖 기분 좋은 향이 풍부하게 맴돈다. 뜨거운 술은, 장쾌하게 마시는 술판보다는 따끈한 차의 정서와 더 잘 통한다.
따뜻한 집에 들어와 차가워진 몸을 녹일 때 간절한 차 한 잔의 효용과 비슷하다. 차보다 어쩌면 더 깊은 향이 나기도 하며 알코올 향, 그러니까 술 냄새가 좀 날 뿐이다. 그야 술이니까. 이 뜨거운 차, 아니 뜨거운 술의 정서는 다양한 문화권에 걸쳐 일맥상통한다.
겨울로 접어들자마자 가장 먼저 당기는 계절 음식은 단연 ‘오뎅탕’이다. 그 후끈한 음식, 그리고 뽀얀 국물 속의 흐물흐물하고 뜨거운 무며 곤약, 어묵. 김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그 냄비 곁에 어울리는 것은 따끈하게 덥힌 일본의 사케다. 사케는 끓이기보다는 덥혀서 마신다.
주로 중탕을 이용해 알코올의 탈출 온도인 78℃를 넘기지 않게 가열하기에 차가우나 덥히나 술이긴 술이다. 덥힌 사케 중에 좀더 겨울에 어울리는 것은 또한 ‘히레사케’다. 말린 복어 지느러미를 우린 이 따뜻한 사케는 구수하고 짭짤한 감칠맛을 품었다.
한국 술 중에서 가장 유명한 온주는 ‘모주’다. 막걸리에 생강, 대추, 계피, 배 등을 넣고 걸쭉하게 끓여 알코올 도수를 1.5도로 뚝 떨어트리고 달달한 향을 더한 것이다. 덜 알려졌지만 자주(煮酒) 역시 끓인 술이다. 고려시대부터 기록이 있다고 하는 이 술은 청주에 대추, 잣, 후추, 계피, 꿀 등을 넣고 중탕으로 한 나절 고아내 마시는데 겨울에는 따뜻한 채로 마셨다. 국순당에서 맥락이 끊긴 한국 술을 복원하는 ‘법고창신’ 라인업으로 출시돼 있다.
▶뱅쇼부터 핫 토디, 아이리시 커피까지
‘뱅쇼(Vin Chaud)’도 잘 알려진 온주다. 빨갛거나 하얗거나, 색은 불문하고 와인을 아무 과일과 함께 끓이기만 하면 간단히 만들 수 있다. 요즘은 가정에서도 흔히 만드는 온주다.
남은 싸구려 와인, 냉장고 구석에서 곯아가는 과일이 있다면 처치하기 좋은 방법이다. 전문가가 만드는 뱅쇼는 좀 더 재료가 다채롭고 맛도 향도 오묘하다. 시나몬, 정향, 팔각 등 향신료도 아낌없이 넣는다.
뱅쇼가 유래한 유럽에서는 어딜 가나 와인에 향신료와 과일을 넣어 끓인 게 있다. 조금씩 들어가는 재료와 비율이 다를 뿐이다. 뱅쇼는 프랑스에서의 이름이고, 영어권에서는 뮬드 와인(Mulled Wine)이 되며 독일에선 글루바인(Gluh Wein), 스웨덴에서는 글뢰그(Glogg)가 된다. 아주 흔한 겨울 음료다.
에그노그(Eggnog)도 흔하다. 위스키나 브랜디에 달걀과 설탕 등을 섞어 만드는데 차갑게 마시기도 하지만, 데워 마시기도 좋다.
비슷한 음료는 톰 앤 제리(Tom and Jerry)가 있다. 고양이와 쥐가 주인공인 만화보다 먼저 등장한 따뜻한 펀치 칵테일이다. 달걀과 브랜디, 우유, 버터, 설탕에 향신료가 들어간다.
‘칵테일의 아버지’ 제리 토마스가 자신의 이름을 거꾸로 붙인 것이 톰 앤 제리인데, 이 아버지께서는 이외에도 진토닉(Gin Tonic), 모스코뮬(Moscow Mule) 등 수많은 칵테일 레시피를 창안하고 정립했다. 물론 그 안에는 뜨거운 칵테일도 포함된다.
1990년대 한국에서 유행하던 ‘플레어바’에서 당시 바텐더들이 벌이던 ‘불쇼’를 떠올려 보자. 두 개의 잔에 불 붙인 술을 번갈아 따르는데, 술이 움직일 때마다 푸른 불길의 궤적이 그려진다. 본래 위스키 스킨(Whiskey Skin)이라고 하던 따뜻한 칵테일의 이름도 제리 토마스가 핫 토디(Hot Toddy)로 개명해 놨다. 위스키, 레몬, 생강, 시나몬 스틱, 정향 등이 사용되는데 모과차처럼 향긋한 칵테일이다. 매일 밤 음복해도 좋달 정도로 겨울에 어울리는 온주다.
핫 버터드 럼(Hot Buttered Rum)은 버터와 설탕에 크림까지 잔뜩 들어가 달콤하고 고소한 겨울의 에너지 음료로 손색 없다. 커피나 핫초코에 술을 섞은 계열의 음료들도 뜨거운 칵테일의 종류다.
대표적으로 아이리시 커피는 아이리시 위스키를 섞은 따뜻한 커피에 차가운 크림을 잔뜩 올려준다. 위스키, 브랜디, 럼 등 숙성한 술의 향은 사실 커피나 초콜릿과 꽤 잘 어울린다.
▶술이 들어간 음식
온주를 이야기하면 ‘플람베’(flambee)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플람베란 고기, 생선 등에 브랜디를 붓고 불을 붓여 향을 입히는 요리를 말한다. 요리사가 음식에 불을 붙이는 것은 더 복잡하고 다면적인 향을 입히기 위해서다. 플람베의 연료로 사용되는 것은 주로 브랜디나 럼주 등 술이다.
굳이 불길을 일으키지 않아도 음식에 술이 들어가는 것은 대체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수프나 소스, 스튜를 끓일 때도 술은 요긴한 향신료가 된다.
대체로 수분인 알코올은 강력한 액체 흡취제다. 기름에 꽃이나 허브를 재어 놓으면 기름에 그 향이 배는 것과 마찬가지다. 기름의 성질과 물의 성질을 동시에 갖고 있는 알코올은 술을 빚은 재료가 가진 온갖 좋은 향들을 꽁꽁 붙들어 매고 있다.
요리사가 음식에 술을 붓고 불을 일으키거나 팔팔 끓이는 것은 술이 가진 향을 음식에 입히기 위함이다. 술이 불이나 열을 만나 향을 퍼트리는 것은 온도에 따른 현상이다.
요리에 술이 사용되는 것은 술로부터 향을 빼앗아 음식에 남기는 의미다.
끓는 점이 78℃인 알코올은 음식의 열기에 못 이겨 기화되기는 한다. 그러나 잠깐, 음식에 넣은 알코올이 말끔히 다 날아간다는 것은 잘못 알려진 속설이다.
왼쪽부터 시나몬 스틱을 꽂은 톰 앤 제리, 버터를 녹여 마시는 핫 버터드 럼, 모과차처럼 향긋한 핫 토디, 차가운 크림과 뜨거운 커피가 어우러지는 아이리시 커피, 만드는 과정에서 바텐더의 손끝을 따라 나타나는 푸른 불줄기가 블레이저의 앞섶과 닮아 블루 블레이저라는 이름이 붙은 심플한 칵테일.
푸른 불줄기의 궤적이 바텐더의 손끝에서 그려지는 ‘블루 블레이저’를 바 원티드의 권경욱 오너 바텐더가 시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