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대이민시대’ 열린다
노동력 부족·첨단산업 육성 영향
작년 영국 이민자 120만명 사상 최대
캐나다·호주도 코로나 이전의 2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선진국에서는 ‘반이민 포퓰리즘’이 기승을 부렸다. 외국인이 내국인의 일자리를 빼앗고 이민자들이 내국인이 낸 세금으로 선진 복지 체계의 혜택을 누린다는 정치 구호가 먹혀들었다. 이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집권에 일조했고 영국은 결국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Brexit)까지 단행했다.
하지만 불과 몇 년 만에 반이민 포퓰리즘은 2010년대 중후반 선진국들이 단행한 잠깐의 ‘일탈’로 평가될 조짐이다.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노동력 부족, 첨단산업 인재 쟁탈전, 포스트 코로나라는 3박자를 타고 지구촌에 ‘대이민 시대’의 바람이 불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영국 시사 주간 이코노미스트지에 따르면 선진국 내 외국 출생자 인구 증가율(전년 대비)은 지난해 약 4%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나라별로는 지난해 영국으로 이민을 간 사람의 수가 약 120만 명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고 스페인으로의 이민자도 사상 최대였다. 캐나다와 호주로의 순 이민자 수도 코로나19 이전의 2배에 달했다. 올해 미국으로의 이민자는 140만 명으로 코로나19 이전보다 3분의 1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민자가 늘어나는 것은 저출산·고령화로 노동력 부족을 우려하는 선진국들이 적극적인 이민 친화 정책을 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선진국들도 출산율 하락에 애를 먹고 있다. 전 세계 출산율은 2000년 여성 1인당 2.7명으로 인구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출산율인 2.1명을 여유 있게 웃돌았지만 최근에는 2.3명으로 떨어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21년 출산율은 1.6명에 불과하다. 이런 가운데 선진국 노동시장이 활황을 보이며 구인난이 발생해 각국 정부는 이민자에게 팔을 벌리며 노동력을 빨아들이고 있다.
세부적으로 캐나다는 2023~2025년 150만 명의 이민자를 유치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민자에게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일본도 특정 기술을 가진 외국인이 무제한 체류할 수 있는 업종을 기존의 노인요양·건설·조선 3개에서 제조업·농업·호텔·요식업 등 12개 업종으로 확대했다.
인공지능(AI)·반도체·전기차 등 미래 첨단산업에서 각국의 인력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는 것도 대이민 시대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다. 첨단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결국 인재가 중요하다는 판단 아래 각국은 우수 인재 친화적인 정책을 펴고 있다. 영국은 AI·핀테크 전문가에게 최대 5년간 영국에서 체류할 수 있는 자격을 주는 ‘글로벌인재비자(GTV)’를 만들었고 해외 최상위 대학 졸업자에게도 ‘세계명문대졸업비자(HPI)’를 주고 있다. 호주는 외국인 학생이 졸업한 후 호주에서 일할 수 있는 기간을 2년에서 4년으로 늘렸다. 독일도 인도와 협정을 맺고 우수한 인도 유학생 유치에 팔을 걷어붙였다.
코로나19 때 억눌렸던 이민 수요가 최근 한꺼번에 분출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코노미스트는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0년과 2021년 이민 관련 비자를 취득했지만 코로나19로 국경이 봉쇄돼 실제 이민은 가지 못하다가 최근 외국으로 건너가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 외에 환율 여건이 좋은 것도 한 이유다. 최근 선진국의 공격적인 금리 인상으로 선진국 통화가치는 상승하고 신흥국 화폐가치는 하락했다. 가령 인도인이 미국에서 1달러를 벌었을 때 과거에는 환율에 따라 70루피만 본국으로 보낼 수 있었지만 이제는 80루피를 송금할 수 있게 됐다. 그만큼 해외에서 일을 하는 것이 이득이라는 뜻이다.
이민 급증이 선진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복합적이다. 저출산·고령화의 악영향을 줄이고 구인난을 완화하는 것은 순기능이다. 중장기적으로도 이민자는 산업계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불어넣을 수 있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의 연구에 따르면 미국으로 이민 온 사람은 미국인보다 기업을 설립할 확률이 80%나 높았다. 선진국이 이민자의 고국과 교역이나 투자를 늘리는 데도 도움이 되고 세금 수입도 증가시킬 수 있다. 다만 상품·서비스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켜 물가를 자극할 수 있고 주택 임대료를 끌어올리는 것은 단점으로 지목된다.
<이태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