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차별로 자국산업 위축 우려…EU, 보복관세·맞불 보조금 고려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의 전기차 보조금 차별 문제를 해소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면서 무역 문제를 둘러싼 양측의 갈등이 고조되는 형국이다.
미국이 막대한 보조금으로 기업 투자를 ‘싹쓸이’하려는 데 위기를 느낀 EU 국가들이 미국에 관세를 부과하거나 자체 보조금으로 맞불을 놓는 방안을 고려하면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시절의 무역전쟁이 재점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20일 정치매체 폴리티코 등 외신 보도에 따르면 EU는 미국의 IRA 시행으로 유럽 내 기업 투자가 위축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IRA는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을 2005년 대비 40% 줄이겠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전기차와 재생에너지 등 기후변화 대응 사업에 3,750억 달러를 투입하도록 했다.
문제는 세액 공제와 보조금 등 혜택을 북미나 미국에서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으로 한정해 유럽 등 외국 기업이 미국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려면 사실상 미국으로 생산 시설을 이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국가 간 투자 유치 경쟁은 ‘제로섬 게임’일 수밖에 없는데 유럽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는 등 이미 기업의 생산 여건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가운데 미국의 보조금으로 더 불리한 상황이 됐다.
실제 미국 전기차 기업 테슬라는 독일 베를린 공장에서 배터리를 만들려고 했으나 IRA의 세액 공제 문제 때문에 배터리 제조 장비를 미국으로 옮기기로 했다. 독일 폴크스바겐도 미국 내 사업 확장을 발표했으며, 철강업체 아르셀로미탈은 독일 내 생산량을 줄이고 미국 텍사스 제철소에 대한 투자 확대 방침을 밝혔다.
이에 EU는 EU 기업도 IRA의 세액공제 혜택 등을 받을 수 있도록 미국과 협상하고 있다. 미국과 EU는 지난 4일 IRA의 전기차 보조금 차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태스크포스(TF) 첫 회의를 열고 본격적인 협의를 시작했지만, 미국 측의 소극적인 태도로 협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폴리티코는 전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EU에서는 미국에 강경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달 26일 파리에서 만나 IRA의 전기차 보조금이 시장 왜곡 조치라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강경히 대응하기로 의견을 모은 것으로 전해졌다.
유럽의회 무역위원회 베른트 랑게 위원장은 미국과 EU가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면 미국을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하고 보복 관세로 맞대응할 수 있다는 입장을 최근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미국과 EU가 러시아와 중국을 상대로 단일 대오를 유지해야 하는 상황에서 전면적인 무역 전쟁은 양측 모두에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이에 따라 EU에서는 미국과 관세 전쟁을 벌이기보다는 자체 보조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티에리 브르통 EU 내부 시장 담당 집행위원은 유럽이 배터리, 반도체, 수소 등 핵심 산업에서 자립 기반을 강화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도록 ‘유럽 연대 펀드’를 조성하자고 주장하고 있으며 독일도 이런 방안을 고려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가운데 다음 달 5일 워싱턴 DC에서 열리는 제3차 미·EU 무역기술협의회(TTC)에서 IRA 문제를 집중적으로 논의할 전망이다. TTC는 트럼프 행정부 시절 훼손된 무역관계 회복 등을 목표로 2021년 9월 처음 개최했다.
양측은 지난 5월15일 파리에서 열린 제2차 TTC에서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는 과정에서 ‘보조금 경쟁’을 자제하고 관련 정보를 교환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