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아침신문을 주우러 마당에 나왔다가 목련꽃에 발목이 잡혔다. 며칠 전만 해도 겨우 꽃눈만 내민 채 거뭇했던 이웃집 목련나무 가지 끝에선 꽃망울이 한창이다. 하얀 꽃망울이 마치 합장한 동자 스님의 여린 손끝 같기도 하고, 맑은 물에 헹궈 곧추세워놓은 붓 같기도 하다.
봄이면 가장 먼저 피는 꽃, 엄마가 생전에 제일 좋아 하셨던 꽃이다. 엄마 생각에 잠시 주춤하는 사이에 옆에서 들려온 '엄마! 뭐해?' 하는 소리에 깜짝 깨어났다. 아직 쌀쌀한 데 반소매 차림인 딸애가 내 옆에 서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야, 감기 들면 어쩌려고, 옷 더 껴입고 가.' 꽥 소리를 지르고선 피식 혼자 웃었다. 내 여고시절에도 겨울이면 내복을 입히려 했던 엄마와 자주 승강이를 벌였다. 지금 내 모습이 딱 엄마 모습이다.
중학교 입학시험 결과 발표를 보러 갔던 날이었다. 합격자 명단 벽보 속에 내 수험번호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난 후, 엄마는 땅만 보면서 터벅터벅 걸었다. 엄마의 침묵에 겁먹은 나는 죄인처럼 그 뒤만 졸졸 따랐다. 광화문 네거리에 도달했을 때 느닷없이 엄마가 국제극장에서 영화를 보고가자고 했다. 어떤 외국영화를 상영했었던 것 같다. 얼마가 지났는지, 어깨를 흔들며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을 때 보았던 엄마의 퉁퉁 부은 두 눈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다행하게도 입시 경쟁이 없는 미국에서 사는 덕분에, 엄마처럼 슬픈 영화를 핑계 삼아 눈이 뻘게지도록 울어야 하는 일이 내게는 없다. 게다가 나는 아이들이 반찬 투정이라도 할라치면 가차 없이 밥상을 치워버리며 버릇을 들인 매몰찬 엄마다. 그뿐인가. 자식의 행복만큼 내 몫의 행복도 당당하게 챙겼기에, 애면글면 덧없는 희생과 인내를 강요받은 적도 없다.
사춘기 시절 내가 원하는 것을 막기라도 하면, 며칠씩 밥도 안 먹고 방문까지 걸어놓은 채 침묵으로 대항했었다. 그런 나를 보며 엄마는 나중에 나와 똑 닮은 딸을 낳아 키워봐야 엄마 심정을 알게 될 거라며 한숨을 내쉬셨다. 돌아보면 엄마는 친구도 없었던 것 같다. 그저 딸만 곁에 있다면 살 수 있는 사람 같았던 엄마. 밖으로 도는 남편에게 아내의 존재감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나였음을 이제 알겠다.
남의 부모 보살피는 일로 고생하는 딸에게 얹혀살면, 내 자식만 더 힘들게 하는 거라고 고집을 피우다가 생의 끝자락이 되서야 겨우 찾아오셨던 엄마. 제 자식 제 남편만 챙기느라 엄마는 뒷전으로 미루고 살았던 딸을 그래도 효녀라고 불러주었던 엄마, 뒤늦게야 후회와 연민으로 마음을 뒤척이는 미련한 딸이다.
내가 엄마를 행복하게 해 드린 적이 있기는 했었는지.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노라‘ 생전에 즐겨 부르셨던 노래 가사처럼 공원묘지 큰 나무 그늘 밑에서 엄마는 영면에 들었다. 겨울이 채 가기도 전에 서둘러 꽃을 피웠다가 잎이 나오면 스러지는 목련꽃, 그래서 하얀 목련의 꽃말이 이루지 못할 사랑인 걸까. 누구나 자기만의 애틋한 이야기 하나 둘 가슴에 품고 사는 것. 아마도 그게 우리네 인생인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