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꽃샘추위에 자라목을 하고 다니느라, 뒷마당 동백꽃이 핀 것도 몰랐다. 붉은 꽃송이를 보자마자 한걸음에 다가갔지만, 푸른 잎 가지사이로 보이는 꽃들은 겨우 예닐곱 송이뿐, 꽃받침을 단 채로, 색도 모양도 싱싱한 채로 떨어져 있는 꽃송이들의 숫자가 훨씬 더 많다.
아쉬운 마음에 그저 한숨만 쉴 수밖에. 그래, 동백꽃이 어디 바람이 분다고 떨어지는 꽃이던가. 마치 늙은 모습을 절대 보이지 않으려 결심한 여인처럼, 그야말로 절정의 자태에 이르렀을 때 낙숫물처럼 뚝뚝 떨어지는 꽃, 은장도를 꺼내 정절을 지켜내려는 청상의 여인처럼, 비장하게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 결심한 듯 스스로 떨어지는 꽃이다. 그래서인지 꽃잎 한 장 흐트러지지 않고 떨어져있는 동백꽃을 보노라면 마음이 처연해진다.
무수한 시인들이 절절한 아픔으로 동백꽃을 노래했던 것도 그런 연유일까. 어느 시인은 동백꽃을 '지상에서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뜨거운 술에 붉은 독약 타서 마시고/ 천 길 절벽 위로 뛰어내리는 사랑/ 가장 눈부신 꽃은/ 가장 눈부신 소멸의 다른 이름이라'고 했다. 어디 시뿐이랴. 대중가요로는 가수 이미자가 부른 ‘동백 아가씨‘ 만큼 우리의 가슴을 저미는 있는 노래도 없는 것 같다.
내가 태어나서 최초로 배웠던 대중가요도 ‘동백 아가씨‘이었다. 내게 이 노래를 가르쳐 준 사람은 엄마였다. 그래서인지 동백꽃을 보면 언제나 엄마가 먼저 떠오른다. 성가대 솔리스트였던 엄마는 찬송가나 가곡이 아니면 절대 부르지 않았다. 유행가는 듣는 것도 금지했던 집안 분위기에서 소위 뽕짝 노래라는 ‘동백아가씨‘를 내게 가르쳐 준 데는 까닭이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엄마는 학교 소풍을 따라 다녔다. 어느 해 봄 소풍가는 날, 달리는 버스 안에서 온 급우들이 ‘동백 아가씨’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그 노래를 알지 못했던 나는 눈을 끔뻑이며 있을 수밖에. 그런 내 모습에 엄마가 열 받았던 걸까. 그 날 저녁 가사가 적힌 종이를 앞에 놓고 내가 외워 부를 수 있을 때까지 가르쳤다. 그 덕분에 ‘동백 아가씨’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사 한자 틀리지 않고 부를 수 있는 나의 유일한 애창곡이 되었다.
돌이켜 보면, 엄마가 유일하게 불렀던 유행가도 ‘동백아가씨’ 뿐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가 집을 비우는 날엔 어둠 짙은 앞마당을 바라보며 엄마는 ‘동백아가씨’를 불렀다. 그럴 때면 나는 엄마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따라 불렀다. 사업 일로 늘 외지로 돌던 남편을 머리카락부터 발톱까지 쏙 빼닮은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방금 피어난 모습 그대로인 채 땅에 떨어져 있는 꽃송이들이 아까워서 주워 모았다. 오늘 저녁엔 수반에 동백꽃 띄워 놓고 ‘동백 아가씨’나 구성지게 불러 볼까나. 어느새 내 나이, 그때의 엄마 나이를 훌쩍 뛰어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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