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 권명오
수필가 · 칼럼니스트
Ⅰ 한국 38년(57)
기다리고 고대하던 제대 특명
고참들과 선임자들은 과거 군입대 초기 자신들이 당한 압박과 고통과 피해를 그대로 신병과 하급자들에게 가혹하게 재연하는 한풀이가 자신을 위한 정당한 보상이라고 착각하는 그릇된 군문화를 반대하고 나는 고참이 된 뒤 하급자들에게 각자 해야 될 임무 이외에는 쓸데없는 정신적인 고통이나 인권을 무시하는 언어나 행동을 금했다. 불공평한 행위를 일소하고 계급이 낮은 위생병들을 김 일병 , 최 상병 이라고 부르지 않고 김선생, 최선생이라고 했고 선임자들에게도 선생님 이라고 호칭을 해 중,상사들로부터 군대에서 선생이 무슨 X 같은 수작이냐고 질책을 당했지만 계속 선생이란 호칭을 고수해 의무중대에서는 내 별명이 선생이 됐으며 제대 할 때까지 권 하사가 아니라 권 선생으로 통하게 됐다.
일제 시대부터 위생병이 군인이면 전봇대에 꽃이 핀다고 했다. 즉 위생병은 군인도 아니라는 말이다. 적성면 가월리 임진강 '틸교' 다리는 영국군 공병대장 틸씨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 이고 우리나라 최초의 잠수교다. 위생병인 나는 검문소 불청객으로 출근해 잡담이나 하면서 편하게 지냈지만 제대 날자가 다가오니 남 모를 고민이 시작됐다. 제대후 직장도 없고 할 일도 없다. 돈 벌이가 안되는 연극을 계속 할 수도 없고 군생활을 하면서 편지를 주고 받던 안신영씨와도 더이상 편지를 할 특별한 소재가 없고 백수가 된 하소연을 할 수가 없다. 어찌 해야 될 지 답을 찾을 길이 없다.
전혀 앞이 안 보인다. 서울에 집이라도 있으면 할 수 있는데까지 연극과 배우의 길로 매진 하겠지만 집이 시골인 나는 기약도 없고 수입도 없는 연극을 한다며 노부모로 부터 하숙비와 용돈을 갖다가 쓸 수가 없어 연극에 대한 꿈을 접고 농사꾼의 길을 선택 할 생각을 하고 나니 그동안 연극을 위해 또 배우가 되기 위해 노력 해 온 모든 것들이 다 수포로 돌아가고 허무해 포기 할수가 없다. 또 대학물까지 먹고 농사를 짖는다는 시골 사람들의 비아냥을 감수 할 수도 없고 꼴란 자존심이 허락치 않는다. 그렇지만 군생활 3년에 대한 후회는 없다. 군생활 3년으로 인해 사회 진출의 기회와 시간이 사장 됐다는 것이 손실의 일부 일뿐 군생활이 내게는 가장 값진 인생의 일부였다.
제대를 앞두고 고심을 거듭해도 답을 찾을 길이 없어 모든 일은 그때 가서 적응 해가며 닥치는대로 해결책을 찾기로 했는데 어머님은 나의 고충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대하면 결혼부터 하라고 제촉을 하면서 신부감 사진을 수집해 맞선을 보라고 재촉을 해 답답하기 이를데가 없다. 할 수 없이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남의 일처럼 재미있게 안신영씨에게 써서 보냈다. 드디어 제대 통보가 내게 왔다. 기쁘고 시원섭섭하고 멍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