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영국과의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대내적으로 의견이 분열되어 있었다. 남부와 서부가 전쟁에 찬성하는 데에 반하여, 뉴욕주와 뉴잉글래드는 전쟁이 그들의 교역에 지장을 주기 때문에 이에 반대했다. 영국에 대한 전쟁은 미국 육군이 완전한 준비를 전혀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포고되었다. 7,000명 미만의 정규군 병사들은 해안과 캐나다 국경, 그리고 먼 내륙 지방에 널리 흩어져 있는 요새에 분산되어 있었다. 이들 정규군 병사들은 규율이 서있지 않은 주민병대의 지원을 받게 되어 있었다.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은 미국의 캐나다 침공과 더불어 시작되었는데, 만약 이 침공이 시간을 적절히 맞추어 수행되었더라면 몬트리올에 대한 연합 작전을 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 작전이 실패하여 영국군이 디트로이트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미국 해군은 거듭 승전하여 미국의 자신을 회복시켰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민간 무장선들이 대서양을 휩쓸면서 1812년에서 1813년에 이르는 가을과 겨울 기간에 영국 선박을 500척이나 나포했다.
1813년의 전투는 뉴욕주 이어리호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후에 대통령이 되는 윌리엄 헨리 해리슨 장군은 디트로이트를 탈환할 목적으로 켄터키주로부터 민병대, 의용군 및 정규군의 부대를 이끌고 진군했다. 9월 12일, 그가 아직도 오하이오주 북부에 있을 때 올리버 해자드 페리 제독이 이어리호에서 영국 함대를 섬멸했다는 소식이 그에게 전해졌다. 헤리슨은 디트로이트를 탈환하고 캐나다로 진격하여, 쫓기는 영국군과 영국과 동맹한 인디언들을 테임즈강에서 무찔렀다. 이제 미국은 그 지역 전체를 장악하게 되었다.
이 전쟁의 또 다른 결정적인 전기는 1년 후 토마스 맥도너 제독이 뉴욕주 북부의 챔블레인호에서 벌이는 근접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마련되었다. 1만 명의 영국 침공군은 해군의 지원을 잃게 되자 캐나다로 후퇴했다. 그 무렵 영국함대는 "무찌르고 쳐부숴라!"라는 명령하에 동부 연안지역을 괴롭히고 있었다. 1814년 8월 24일 밤, 영국함대의 원정대가 연방정부의 본거지인 워싱턴 D.C로 쳐들어와 워싱턴은 화염에 싸이게 되었다. 제임즈 매디슨
대통령은 버지니아주로 피신했다.
이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미국과 영국 협상대표들은 서로 상대방에 대해 양보를 요구했다. 하지만 영국 대표들은 챔블레인호에서 맥도너가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을 알자 양보하기로 결정했다. 웰린턴공으로부터 협상을 타결하라는 촉구를 받고, 또 국고의 고갈에 직면한 끝에 영국 협상대표들은 1814년 12월 젠트(Gent) 조약을 받아들였다. 이 조약으로 전투는 중지되고 점령지는 반환되었으며, 국경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이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쌍방은 루이지애나의 뉴올리언즈에서 전투를 계속했다. 앤드류 잭슨 장군이 이끄는 미국군이 이 전쟁의 지상 전투 승리 중 최대의 승리를 거두었다.
영국과 미국의 대표들이 해결책을 협상하고 있는 동안, 매사추세츠주, 로드아일랜드주, 코네티컷주, 버몬트주 및 뉴햄프셔주의 의회가 선출한 연방주의자들의 대표들이 "매디슨씨의 전쟁"에 대한 반대를 상징한 모임을 코네티컷주의 하트포드에서 가졌다. 뉴잉글랜드는 이 전쟁 전반을 통해 힘들게나마 적과 교역을 할 수 있었고, 일부 지역들은 실제로 이 교역을 통해 번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방주의자들은 이 전쟁이 경제를 파멸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회의에 참가한 일부 대표들은 연방으로부터의 탈퇴를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대표들은 60일 이상 지속되는 금수조치를 금지하고, 또 동일한 주에서 대통령이 연달아 나오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을 포함하는, 공화주의자들의 영향력을 제한하기 위한 일련의 헌법수정에 찬동했다. 하지만, 하트포드 회의가 보낸 사자가 워싱턴 D.C에 도착했을 때는 전쟁은 이미 끝난 후였다. 이 하트포드 회의는 연방주의자들에게 그들이 결코 벗어날 수 없었던, 不忠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낙인을 찍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