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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의 시] ‘초로(草露)’

‘초로(草露)’ -서정춘 나는 이슬방울만 보면 돋보기까지 갖고 싶어진다나는 이슬방울만 보면 돋보기만한 이슬방울이고이슬방울 속의 살점이고 싶다나보다 어리디어린 이슬방울에게나의 살점을 보태 버리고 싶다보태 버릴수록 차고 달디단 나의 살점이투명한 돋보기 속의 샘물이고 싶다나는 샘물이 보일 때까지 돋보기로이슬방울을 들어 올리기도 하고 들어 내리기도 하면서나는 이슬방울만 보면 타래박까지 갖고 싶어진다-------------------------- 대롱대롱 풀잎 끝에 매달린 이슬방울에 삼라만상이 비친다. 그 앞에 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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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의 시] 사랑한다

‘사랑한다’ -정호승 밥그릇을 들고 길을 걷는다목이 말라 손가락으로 강물 위에사랑한다라고 쓰고 물을 마신다갑자기 먹구름이 몰리고몇 날 며칠 장대비가 때린다도도히 황톳물이 흐른다제비꽃이 아파 고개를 숙인다비가 그친 뒤강둑 위에서 제비꽃이 고개를 들고강물을 내려다본다젊은 송장 하나가 떠내려오다가사랑한다내 글씨에 걸려 떠내려가지 못한다 ----------------------------------------------- ‘사랑한다’는 말에 걸려 떠내려가지 못하는 게 한둘이랴. 긴긴 겨울밤마다 고라니가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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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의 시] 바퀴 달린 가죽가방

‘바퀴 달린 가죽가방’   -이선희 온갖 잡동사니들이 들어 있을무엇을 쑤셔 넣으면 한없이 들어갈바퀴 달린 가죽가방비뚤어지게 서 있는희끗희끗 때 묻은 것이울퉁불퉁 늘어진 것이벌써 여러 곳을 거쳐 왔을바퀴 달린 가죽가방여행의 경유지나 기착점을 모른 채속이 열릴 때까지 지퍼를 닫고 굴러갈바퀴 달린 가죽가방낡은 바퀴로 끝까지 가 보겠다며공항 대기실, 의자 옆에 손들고 서 있는바퀴 달린 가죽가방  ♦ 본래부터 잡동사니가 아니었을 것이다. 차곡차곡 개어 넣었을 것이다. 세면용품이며, 보조 배터리며, 안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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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의 시] 완행열차

‘완행열차’ -허영자 급행열차를 놓친 것은 잘된 일이다.조그만 간이역의 늙은 역무원바람에 흔들리는 노오란 들국화애틋이 숨어 있는 쓸쓸한 아름다움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완행열차를 탄 것은 잘된 일이다.서러운 종착역은 어둠에 젖어거기 항시 기다리고 있거니천천히 아주 천천히누비듯이 혹은 홈질하듯이서두름 없는 인생의 기쁨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가 이따금 멈추어서 뒤를 돌아보곤 했다고 한다. 너무 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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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의 시] 혼잣말

‘혼잣말’ -남태식 노인이 흘리는 혼잣말은텔레비전이 혼자 듣는다.노인이 흘리는 혼잣말은냉장고가 혼자 듣는다.노인이 흘리는 혼잣말은벽이 혼자 듣는다.노인이 흘리는 혼잣말은노인이 혼자 듣는다.노인이 흘리는 혼잣말은안에, 안에만 듣는다. 살아온 내공이라 부르겠다. 리모컨을 누르면 제 할 말만 떠들어대던 텔레비전이 귀를 쫑긋 세우다니. 문짝을 열면 애 어른 구분 없이 다짜고짜 찬 김을 얼굴에 내뿜던 냉장고가 노인의 말을 듣다니. 오죽하면 벽에 대고 이야기한다던 그 벽에 귀가 생기다니. 나이가 든다는 것은 사물이 경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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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의 시] ‘무심(無心)에 대하여’

‘무심(無心)에 대하여’ -정호승 어디서 왔는지 모르면서도 나는 왔고내가 누구인지 모르면서도 나는 있고어느 때인지 모르면서도 나는 죽고어디로 가는지 모르면서도 나는 간다사랑할 줄 모르면서도 사랑하기 위하여강물을 따라갈 줄 모르면서도 강물을 따라간다 산을 바라볼 줄 모르면서도 산을 바라본다모든 것을 버리면 모든 것을 얻는다지만모든 것을 버리지도 얻지도 못한다산사의 나뭇가지에 앉은 새 한 마리내가 불쌍한지 나를 바라본다무심히 하루가 일생처럼 흐른다 ∗산사의 새가 설마 시인을 불쌍히 여기겠는가? 풍경소리 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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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의 시] ‘금계국 웃음꽃’

‘금계국 웃음꽃’- 권숙월 자리를 탓할 입이 금계국에게는 없다 웃음꽃 활짝 피워 주변을 밝힌다 어디든 발붙이고 살면 그 자리가 좋은 자리, 남 탓하는 입이 있었으면 해맑은 웃음 나누기 어려웠으리 금계국이 잡초가 내민 손 뿌리치는 것 본 적 있는가 피눈물 흘리는 것 본 적 있는가 속울음 삼켜보지 않은 이 어디 있으랴 걱정 없는 이 어디 있으랴 울 일보다 웃을 일이 더 많은 게 세상살이라는 걸 깨우쳐 주는 꽃자리,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이든 웃음꽃 보여주는 날은 나비도 꿀벌도 찾아온다는 것 알 수 있으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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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의 시] 낙타

'낙타' - 신경림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별과 달과 해와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손 저어 대답하면서,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별과 달과 해와모래만 보고 살다가,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길동무 되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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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의 시] 벚꽃

‘벚꽃’ - 유자효  기적처럼 피어났다 벼락처럼 오는 죽음  박혜숙 ‘Alter’단 두 행의 시가 종이를 베는 검처럼 예리하다. 벚꽃이 피고 지는 찰나에 대한 통찰이 삶 전체를 관통한다. 무한한 우주 시간 속 어떤 생의 명멸인들 찰나가 아니겠는가. 광년을 달려오는 별빛의 생성과 소멸도 기적처럼 피어났다 벼락처럼 오는 죽음일 수 있겠다.그러나 아침햇살에 스러질 이슬이 세상을 비추는 것처럼, 찰나 속에 영원이 깃들어 있을 것이다. 찰나에 응결되지 않는 영원이란 얼마나 지루할 것인가. 벚꽃은 추락조차 춤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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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의 시] '먹염바다'

‘먹염바다’ -이세기 바다에 오면 처음과 만난다그 길은 춥다바닷물에 씻긴 따개비와 같이 춥다패이고 일렁이는 것들숨죽인 것들사라지는 것들우주의 먼 곳에서는 지금 눈이 내리고내 얼굴은 파리하다손등에 내리는 눈과 같이뜨겁게 타다사라지는 것들을 본다밀려왔다 밀려가는 것 사이여기까지 온 길이생간처럼 뜨겁다햇살이 머문 자리괭이갈매기 한 마리뜨겁게 눈을 쪼아 먹는다 정인옥‘Ocean of the Day’바다는 생명이 처음 시작된 곳이다. 밀려왔다 밀려가는 것 사이, 우리가 지금 여기 존재하고 있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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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의 시] 새해 인사

'새해 인사' - 나태주 글쎄, 해님과 달님을 삼백예순다섯 개나공짜로 받았지 뭡니까그 위에 수없이 많은 별빛과 새소리와 구름과그리고꽃과 물소리와 바람과 풀벌레 소리들을덤으로 받았지 뭡니까이제, 또 다시 삼백예순다섯 개의새로운 해님과 달님을 공짜로 받을 차례입니다그 위에 얼마나 더 많은 좋은 것들을 덤으로받을지 모르는 일입니다그렇게 잘 살면 되는 일입니다그 위에 더 무엇을 바라시겠습니까?---------------------------아, 해님과 달님이 공짜였군요. 제가 낸 세금으로 뜨는 줄 알았어요. 별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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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의 시]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김종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나는 시인이 못 되므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서울역 앞을 걸었다.저녁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그런 사람들이엄청난 고생 되어도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그런 사람들이이 세상에서 알파이고고귀한 인류이고영원한 광명이고다름 아닌 시인이라고. 오미쉘‘Agape Trace #55’세상에는 시를 쓰는 사람이 있고, 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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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의 시] 애기메꽃

‘애기메꽃’ - 홍성란 한때 세상은날 위해 도는 줄 알았지날 위해 돌돌 감아 오르는 줄 알았지들길에쪼그려 앉은 분홍치마 계집애 로버트 이-‘Re Created Orange day Lilies’쪼그려 앉은 무릎을 펴고 일어서보니 키가 훌쩍 자랐지. 분홍치마가 유치해져서 벗어던졌지. 날 위해 돌던 세상은 따로 돌고 있었지. 세상의 중심을 향해 내가 돌아야 했지. 어지러워서 발이 엉키고 쓰러지기도 했지. 한때 세상이 나를 위해 돌았던 추억의 힘으로 다시 일어서지. 할머니가 되어도 분홍치마의 색깔은 바래지 않지. 애기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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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의 시] 단양 마늘

‘단양 마늘’ -정기복여섯 쪽을 갈라 한 쪽을 심어도어김없이 육 쪽이 되는 마늘서리 내린 논밭에다두엄 뿌려 갈아 묻고짚 덮어 겨울 나면봄 앞질러언 땅 뚫고 돋는 새순맵기는 살모사 같고단단하기는 차돌 같은 단양 마늘약값도 안 되고, 품값도 안 되는 것을육순 노모해마다 심는 정은쪽 떼어 묻어도육 남매 살 붙어 열리기 때문일까쪽쪽 떼어 뿌려도어김없는 육 쪽 마늘 ∗ 저런 괴이한 일이 있나. 21세기 과학의 시대에 홍길동 분신술이 판을 치다니. 서리 내리는 까닭은 생육을 멈추라는 하늘의 뜻인데 가을에 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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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의 시] 꽃과 함께 식사

‘꽃과 함께 식사’ - 주용일 며칠 전 물가를 지나다가좀 이르게 핀 쑥부쟁이 한 가지죄스럽게 꺾어왔다그 여자를 꺾은 손길처럼외로움 때문에 내 손이 또 죄를 졌다홀로 사는 식탁에 꽂아놓고날마다 꽃과 함께 식사를 한다안 피었던 꽃이 조금씩 피어나며유리컵 속 물이 줄어드는꽃들의 식사는 투명하다둥글고 노란 꽃판도보라색 꽃이파리도 맑아서 눈부시다꽃이 식탁에 앉고서부터나의 식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외로움으로 날카로워진 송곳니를함부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슬픈 전설의 손목을 꺾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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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의 시] '걸친, 엄마'

이경림 한 달 전에 돌아간 엄마 옷을 걸치고 시장에 간다엄마의 팔이 들어갔던 구멍에 내 팔을 꿰고엄마의 목이 들어갔던 구멍에 내 목을 꿰고엄마의 다리가 들어갔던 구멍에 내 다리를 꿰!고, 나는엄마가 된다걸을 때마다 펄렁펄렁엄마 냄새가 풍긴다- 엄마……- 다 늙은 것이 엄마는 무슨……걸친 엄마가 눈을 흘긴다 ------------------------------------------불에 태우거나 보공으로 넣지 않고 돌아가신 엄마 옷을 걸치다니, 걸친 엄마는 절친 엄마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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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의 시] 추석 무렵

'추석 무렵' - 김남주 반짝반짝 하늘이 눈을 뜨기 시작하는 초저녁나는 자식 놈을 데불고 고향의 들길을 걷고 있었다.아빠 아빠 우리는 고추로 쉬하는데 여자들은 엉덩이로 하지?이제 갓 네 살 먹은 아이가 하는 말을 어이없이 듣고 나서나는 야릇한 예감이 들어 주위를 한번 쓰윽 훑어보았다. 저만큼 고추밭에서아낙 셋이 하얗게 엉덩이를 까놓고 천연스럽게 뒤를 보고 있었다.무슨 생각이 들어서 그랬는지산마루에 걸린 초승달이 입이 귀밑까지 째지도록 웃고 있었다.--------------------반짝반짝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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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의 시] 생강꽃처럼 화들짝

윗집 사람과 아랫집 사람, 싸움이 났다   담장 넘어온 닭 때문이라지만 두 분 사랑싸움이다   산 고개 여러 번 넘은 정분이지만 딱, 그만큼이다   된장찌개 끓인 날은 아랫집 사람의 순정이 윗집 마루에 슬그머니 놓여있다   아무렇지 않게 숟가락 빠트리고 싱겁네, 물이 더 들어갔네 구시렁구시렁 웃음으로 넘어간다   마당에 풀어논 닭들이 모이를 쪼아 먹으며 아랫집 담장 밑을 서성이고 윗집 사람 속을 읽는 닭이 그저 모가지만 냈다 뺐다 찍었다 헤치다 요래조래 왔다 갔다 서로 보일 듯 말 듯한 거리에서 생강꽃처럼 화들짝, 화들짝 눈깔사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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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의 시] 제비 세 마리

'제비 세 마리' - 권숙월 현관문 앞에 똥을 누는 제비, 밉지 않다유월 초 땅거미 질 무렵이면 찾아와 자고 가는 제비 반갑기만 하다아내는 저녁이면 “제비야 잘 자~” 아침이면 “제비 잘 잤어?” 손주들에게 말하듯 한다제비 역시 알아들은 듯 고갯짓을 한다어미 품 벗어나 허해서일까현관 전깃줄에 앉아 몸을 밀착시키는 제비 세 마리, 나란히 같은 쪽에 머리를 두고 있다 가끔 돌아앉아 반대쪽에 머리 두는 녀석도 있지만 서로의 몸 닿는 일 잊지 않는다어느 날 불현 듯 이 집을 벗어나 낯선 처마 밑을 떠돌겠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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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의 시] '아내와 나 사이'

‘아내와 나 사이’ -이생진  아내는 76이고나는 80입니다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누구 기억이 일찍 돌아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올 것입니다서로 모르는 사이가서로 알아가며 살다가다시 모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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