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들여다보노라면 문득 낯설게 느껴진다. 이게 내 얼굴인가. 노년의 저 깊고 견고한 주름. 지난 시간에 의하여 그 부드러움을 박탈당한 저 메마른 얼굴 뒤에 숨어 있는 진정한 표정은 무엇인가. 저 무력하고 완강한 침묵. 이 세상에 대하여 일체의 발언권을 박탈당한 듯한 저 ‘벙어리 됨’속에는 어떤 호소가 숨어있는가. 

노인들을 보고 있으면 슬퍼진다. 외롭거나 불쌍한 노인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나도 늙어가고 있고, 또 주변에서 노인 소리를 들으면서 비롯된 강박관념이랄까. 행복한 노인도 슬프긴 마찬가지다. 마음까지 비추는 거울이 없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퍽 다행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거울 앞에서 누구나 자신만만할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제 거울을 멀리한지도 오래 되었다. 

나도 노인 소리 들으면서부터는 사진 찍기가 싫다. 공개되어야 할 사진을 찍기는 더욱 싫다. 두렵기조차 하다.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건 지금 사진 찍는 일이 아니라 어느 날, 정말로 노망들어 사진 찍기를 좋아하고 어디든지 나서고 싶어 하게 되는 일이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인간이면 어느 누구도 늙음을 피할 수가 없는 것을. 육체의 나이를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든 정신의 성숙도 함께 꾀해서 나이 들어 진실로 지혜롭고 멋진 사람이 되어야 하리라. 노인이 되면서 몸가짐에 조심하게 된다. 말이 많아지는 것은 나이가 들었다는 징표다. 

이제는 노인 스스로 지혜롭게 사는 법을 터득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늙음이야말로 인생의 최대 스트레스라고 어느 의학자가 말했다지만, 그것은 아무리 잘 견디는 사람에게도 일정한 강박과 억울함으로 다가온다. 여인들 중에는 몸은 40, 50, 60을 넘었지만, 마음은 아직 10대에서 전혀 자라지 않은 사람도 있다. 이미 노화가 상당히 진행된 여인과 세월 방공호로 숨어들어간 막무가내들… 

늙어간다는 것에 대한 자포자기도 얄궂지만, 늙어간다는 것에 대한 저 처절한 손사래도 안쓰럽다. 어찌 여인들뿐이겠는가. 물론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은 우리 모두가 꿈꾸는 삶이다. 그것이 개인과 사회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 그러나 무턱대고 오래 사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영화배우 배클린 비셋은 “젊은 시절에는 그저 용모로 평가되지만, 나이든 여자는 폭넓은 경험, 이해심, 포용력 등 스스로를 어떻게 길들이고 주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에 따라 아름다운 여자, 혹은 심술궂은 여자로 평가된다.”고 했다.

거울에 비친 자신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로 시선을 돌려 자신의 따스한 손을 내밀어줄 수 있을 때 ‘잘 늙어간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야 얼굴의 주름도 고단한 삶의 증명서가 아니라 오랜 세월 공들여 만든 우아한 작품처럼 보이리라. 나이는 분명 자신을 들여다보고 비추어 볼 수 있는 또 다른 의미의 거울이다.

나는 이런 노인이 되고 싶다. 넉넉하고 윤택하지 않아도 삶이 그윽하고 만족스러워 무엇을 먹어도 무엇을 입어도 어디에 살아도 즐겁게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고마워하며 살 수 있는 분.  언제 삶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 하면서 자신의 주변을 흐트러지지 않게 정리하시는 분. 자기를 애써 돋보이려고 하는 것은 실은 자기 확신이 없고 속이 텅 빈 모습이라는 사실도 보고, 늙음을 초조하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추하고 딱한 모습인가 하는 것도 보시는 분. 나는 이러한 노인을 만나면 그런 노인이 되고 싶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단순히 늙어가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생에 대해 더욱 완숙해지고, 더욱 풍부해지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진실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나이 들고 늙는 그 자체가 아니라, 정신의 완숙이 없이 육체만 늙어버린 상태이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우리가 진실로 싫어하고 경계해야 할 것은 외형의 주름살이나 구부러진 허리가 아니라, 아직도 다스리지 못한 욕망을 덕지덕지 내보이며 생리적 연치만 내세워 심술을 부리는 그런 노년의 상태일 것이다. 집안에도 그렇고, 나라에도 그렇고, 진정한 어른이 건재하고 사랑과 활기에 찬 노인이 계시는 곳은 눈부실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