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 권명오
수필가 · 칼럼니스트
Ⅰ한국 38 년(50)
조교의 '빳다' 세례와 수도 육군병원 전출
홍 병장은 근무 생도와 구대장 4명을 엎드려 뻗쳐를 시킨 다음 차례로 무자비히게 내려 치기 시작했다. 세번째가 되는 나는 첫번째 구대장이 홍 병장의 강하고 야무진 방망이 '빳다'를 맞고 마치 개구리가 다리를 뻗고 죽어가듯 땅바닥에 사지를 뻗어 버리는 것을 보는 순간 심장이 질려 버렸는데 그 다음 구대장 역시 '빳다' 세례를 받고 땅바닥에 뻗어 버렸다. 그 다음 방망이가 나를 내려쳤고 나는 이를 악물고 버티려 했지만 한쪽 다리가 힘없이 땅에 떨어지면서 양쪽 다리와 몸 전체가 땅 바닥에 오징어처럼 깔려 버렸다.
나는 다리가 떨리고 말을 안듣는 것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홍 병장은 계속 '빳다' 세례를 가했고 나를 제외한 3개 구대장과 근무 생도가 땅바닥에 사지를 뻗은 채 일어나지 못하고 신음하는 개구리 신세가 됐다. 난생처음 당해본 방망이 '빳다' 세례였다. 그 당시 홍 병장의 '빳다'를 맞고 사생결단으로 억지로 일어선 나를 의무학교에서는 무척 쎄고 강한 독종이라고 평했지만 사실은 죽기 살기 악을 쓴 결과였다. 다른 구대장들 보다 강하거나 쎈 것이 절대 아니다. 그 후 방망이 '빳다' 세례를 당한 구대장 5 명은 3 주 이상 고통을 당했다. 우리는 8 주 교육이 끝나고 어떤 부대와 지역으로 배치될 것인지 그것이 큰 관심사였다.
최고의 근무지는 각 지역 군병원인데 '빽(배경)' 이 있어야 된다. 인사과에 고향 친구가 있는 위생병이 나에게 상황를 알아 봐주겠다고 한 후 알아본 결과 이번 부대 배치 중 서울 수도육군 병원 차출이 6명이나 된다며 미리 손을 써야 하는데 돈이 필요 하다고 했다. 그 당시는 그런 것이 일반화 됐고 맨 입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어머니가 챙겨준 비상금이 그대로 있어 그 돈을 썼다. 죄를 지은 나는 법을 어긴 덕분에 의무교육 8주가 끝나자 원했던 대로 수도육군병원으로 발령을 받았다. 나는 서울에서 편히 군 생활을 하면서 연극 활동을 하는 친구들과 다시 꿈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됐다.
나는 그 당시 양심의 가책보다는 미래에 대한 꿈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부정행위를 게의치 않았다. 이제사 뇌우치고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빈다. 수도육 병원으로 차출된 의무병들은 개인적으로 발령 받은 날짜에 전입신고를 하게 돼있어 먼저 친구들과 회포를 풀고난 후 오후 늦게 병원을 찾아가 신고를 했다. 수도육군병원은 경복궁 옆 삼청동에 있었는데 일제가 건축한 경기 도립병원이다. 구 건물 이지만 최고의 시설을 갖추고 있고 각 병동마다 난방 시설이 돼있고 군의관들은 명성있는 전문의사들이었다. 위생병들도 거의 다 장관 아니면 국회의원 아들이었고 또 서울에 사는 '빽'과 돈이 있는 자제들이었다. 나같은 촌놈은 극소수였다. 그 때문에 군기는 해이하고 무질서했고 장교들도 사병들을 존중하고 선임자들도 지나친 월권행위나 횡포나 구타를 가하는 일이 없어 사병으로서는 최고의 근무지였다. 그런데 특별한 것은 위생병들이 자기가 근무하는 병실이나 각 부서에서는 맡은 바 책임을 다 완수 한다는 사실이다. 강압적인 통솔만이 최고의 수단과 방법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