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는 누구나 경험하는 삶의 한 부분 입니다. 실패는 일상적이며 보편적인 삶의 경험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실패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누구나 인정하기 싫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실패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실패가 노출되거나 지적될 때마다 분노와 수치감을 감추지 못합니다.
스탈린이 집권을 시작하자 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어린 시절에 알았던 친구를 하나씩 다 죽여버리는 일이었습니다. 이 스탈린의 행동을 우리는 “자기의 부끄러운 과거를 묻어 버리기 위한 인간의 파괴적인 성향의 노출”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흔히 실패할 때 마다 우리가 그것을 처리하기 위해서 하는 행동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과거의 실패를 망각하거나 또는 실패를 미화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실패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에 대한 잘못된 접근 때문에 우리의 삶은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이것이 우리 역사의 한 비극이기도 합니다. 우리 과거의 역사, 한국의 인물사에서는 종종 실패의 본보기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역사 속에서 소위 위인들의 일생이 미화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그들의 실패에 대해서 들을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습니다. 실패의 본보기가 없는 것이 우리 역사의 비극 중의 하나입니다.
거기에는 성공의 본보기가 주로 소개되게 마련입니다. 성공의 예가 없으면 창작해서라도 성공의 본보기를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김일성과 김정일의 비극이기도 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가 성경의 정적성 앞에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실패 앞에 정직합니다.
성경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마다 그 사실에 먼저 깜짝 놀랍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성경의 인물들의 생애에서의 그들의 약점과 부끄러운 실패를 성경은 여지 없이 폭로하고 있습니다. 실패의 본보기는 어쩌면 우리에게 더 요구되는 삶의 본보기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 실패를 통해서 더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실패의 본보기로 베드로를 들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저주한 사건 이후에 전개되는 일련의 사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실패 후 도저히 주님 앞에 설 수 없다고 느끼면서 주님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자신을 피하는 베드로를 찿아갔습니다. 그리고 실패를 깨닫게 하시고 실패의 이유와 실패의 진상을 알려 줍니다.
그 실패에서 베드로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드라마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21장의 내용입니다. 우리도 실패할 때마다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것은 실패의 현장에서 도피하고 싶은 유혹입니다. 그래서 실패한 다음에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실패했던 그 일이나 그 현장에서 돌아섭니다. 접어치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베드로를 맨 처음에 부르셨을 때 그의 삶을 변화 시키면서 그에게 주셨던 약속이 무엇이었습니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그는 물고기를 잡다가 그의 삶이 변화되어 이제는 사람을 낚는 인간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위대한 사명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들도 그렇습니다. 실패를 했다고 해서 사람들을 멀리하지 말고 사람앞에 더 가까이 나아와서 그 실패를 이야기 하면서 더 좋은 경험도 듣고 체험하면서 주님께 나의 실패를 여쭈어 보시길 바랍니다.
그리하면 그 실패 속에서 새로운 희망이 보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