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지 않은 질문이요, 절벽 산책 같은 낯선 이 땅, 만만치 않은 질문이요, 가슴 시린 현실이다.
1980년 나는 다운타운 흑인가 애틀랜타에서 가장 험악한 범죄 지역에서 8년간 식당을 운영했다. 이름도 듣지 못한 소울푸드라는 남부 특유의 음식점을 팔레스타인인이 팔고 간 식당을 인수했다. 하루 매상은 100불 정도. 식당에는 손님이 없었다. 흑인 쿡 한사람이 부엌에서 쿡을 했고 난 손님들에게 음식을 팔았다. 하루 아침에 내 인생 자체가 흔들리는 암흑에서 가끔은 손등을 꼬집어보기도 했다. 이게 꿈이 아닌가? 눈을 떠 보면 홈리스, 가난한 저소득층의 흑인 시장, 백인들이 좋은 고기를 먹는 동안 소 내장, 돼지 창자, 돼지 귀 모든 동물의 내장들을 팔고 있었고 처음 그 시장을 찾아 온 사람들은 코를 막고 들어왔다. 40개의 점포가 들어선 ‘미니 슈퍼마켓’ 1928년 마틴 루터 킹 목사 부모님이 그 시장을 세웠다한다. 하도 시장이 험악해서 한국인들은 일명 ‘도깨비 시장’이라 불렀다.
그중 그 식당은 의자 열개인 작은 간이 식당이었다. 주말이면 초등학생인 세 자녀들은 접시를 닦고 흑인들이 먹다 남은 테이블을 닦고 자랐다. 나는 가끔 정신이 들면 왜 내가 여기 있는가였다. 석달만 참고 이 홈리스들에게 배불리 먹이고 귀국해야지... 그렇게 마음을 비우고 나니,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를 홈리스들도 귀하고 다정한 마음을 주고 떠나고 싶었다. 남편이 외교관 시절 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국가 대표로 선택받은 특수층의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과 무엇이 다른가.. 내 생애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머리를 빡빡 깎고 찾아오면 감옥에서 살다 온 아이들이었다.
집에 돌아 갈 돈이 없으니 10불만 주세요. 하두 많이 들어서 거짓말 일수도 있지만 그냥 준다. 백인들이 점심을 사러오면 옆에 서서 자신의 점심도 사 달라 부탁한 그 아이들. 세상에 음지식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사는 세상도 이처럼 음지 지대가 있음을 알았다. 왜 내가 여기 서 있는가? 어쩌면 내 생애 다시는 볼 수 없는 절호의 기회인지도 몰랐다.‘저들을 배불리 먹이자.’ 쿡에게 항상 여분의 음식을 만들게 하고, 밥솥에는 항상 따뜻한 밥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 식당을 찾아 온 손님에게 항상 묻는 말이 있다. “더 먹을래”였다. 어차피 석달만 이들을 배불리 먹이고 귀국할 마음으로 난 그들에게 천사의 대접을 했다. 밖에 길에 누운 홈리스 아이들을 불러 남은 음식은 버리느니 배불리 먹였다.
범죄 소굴이요, 무법천지인 다운 타운 에지우드 아베뉴를 그 시절 모른 사람이 없었다. 총을 들지 않고는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캄캄한 밤, 귀가하다 가방을 털린 상가 주인들, 차 밑에 몰래 누워 돈을 몽땅 빼앗긴 사람, 생각하면 그 범죄의 소굴에서 오늘 살아남아 있는 것이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었다. "영, 너의 차 어디에 있니?" 나의 이름을 아는 아이들은 우리집 식당에서 내가 밥을 먹인 그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에게 석달만 배불리 먹이고 귀국해야지... 난 험악한 식당, 그 자리에서 17년을 그들과 함께했다. 무엇이 나를 그 세월을 거기 서 있게 했는지 나도 모른다.
돈보다 더 많이 베풀고 사랑으로 섬기는 마음이 그들이 천사처럼 내게 소중했다. 부활절이면 10마리 터키를 쿡해서 홈리스센터를 찾아가 남은 음식이 아닌 따뜻한 음식을 그들에게 베풀었던 날 난 왕비보다 나 자신이 더 행복했었다.
식당이 소문에서 입소문이 퍼지고 애틀랜타 다운타운에 명소가 되었다. 매상도 하루 100불이 2,000불 이상으로. 고깃간보다 더 많은 요리를 했었다. 자리가 없으므로 ‘투고’를 중심으로 인근 그래디병원 의사, 간호사들 그 시절 ‘찰리스 다이너’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 글을 쓰는데는 이유가 있다. 지금은 이민자의 현 주소가 다소 다르다 해도 ‘인지상정’이란 말처럼 내가 먼저 베풀어야 성공한다. 밥 한솥 더 한다해서 식당은 절대 망하지 않는다. “너 뭐 좀 더 먹을래?” 묻는다면 그 손님은 단골이 된다. 식당 뿐 아니라 웃으면서 손님을 만나고 형제처럼 대하라. 사는 동네에서 꽃도 가꾸고 거리 청소도 하라. 이웃들이 먼저 알고 형제처럼 대한다.
웃지 않기로 유명한 한국인들, 우리가 먼저 웃고, 인사하면 이웃은 얼마나 많은 배려를 하는지 모른다. 학군이 좋은 동네에 모여 사는 한국 젊은이들 인사는 커녕 얼굴도 서로 마주치길 싫어한다는 선배의 한마디가 가슴 아프다. 이민자의 삶 그 성공은 많은 물질을 좋은 학교를 나오는 것보다 마음 따뜻한 사랑의 배려가 행복의 열쇠다. 코로나 이후 요즘처럼 동양인들이 살기 힘든 때가 없었다. 어느 날 이웃 미국 할머니와 함께 걷는 날 그 할머니가 내게 던진 질문이 가슴 아팠다. “너 그 기사 읽은 적 있니?” 캐나다를 통해서 한국에서 미녀들이 대거 애틀랜타에 투입 되었다는 뉴스를. 난 할말이 없었다. 그렇게 살려고 이민자의 삶을 선택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가슴시린 사건들이 우리의 자녀들이 살아갈 이 땅에서 길을 잃고 헤매지는 않아야할텐데... 이민의 삶 성공은 돈 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기업에서 우수 인재를 선택하는데 첫째를 ‘인성’이라 말한다. 서로 돕고 사랑하는 따스한 마음만 있는 자녀는 이민자의 땅에 절반은 성공한 것이다.
봄꽃들이 만발한 애틀랜타, 산 좋고 , 물 좋은 좋은 동네로 우리 함께 만들었으면 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