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 엘리어트의 황무지(Waste Land)에서 그는 St. 어거스틴의 “참회록(Confessions)”을 인용하여:“카르타고로 그때 나는 왔다. 불이 탄다, 탄다, 탄다, 탄다. 오 주여! 당신이 저를 건지시나이다. 오 주여! 당신이 저를 건지시나이다.”

17세에 북 아프리카의 카르타고로 가서 대각견성을 한 St. 어거스틴이 “참회록(Confessions)”이란 대작을 통하여 ‘영적대각성(The Great Awakening)’을 이루었던 그 위대한 영적 고민을 20 세기를 대표하는 지성의 시인 T.S. 엘리어트 역시 1차 대전의 전쟁의 비극의 참화를 겪으면서 그 소용돌이 속에서 동일하게 고민했던 참회의 흔적을 “황무지라”는 대서사시를 통하여 St. 어거스틴과의 동병상련(同病相憐)을 절감하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어거스틴, 엘리어트 등과 비록 동시대인은 아닐지라도, 고린도교회가 처한 당시의 상황 속에서 느끼는 바울 자신의 통절한 마음은 별 다를 바 없는 “군중 속의 고독”은 너무나 처절하였습니다. 당시의 정치, 사회, 문화, 종교 다방면에 깊이 침투한 시대적 상황은 “영지주의(Gnosticism)”가 팽배한 <절망상황>이었습니다. 영지주의는 육체는 더럽고 영혼은 깨끗하니 더러운 육체에는 소망이 없으므로 이원론적인 영육의 분리이해의 시각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불완전한 신(神)인 <데미우르고스>가 완전한 신(神)의 영, <프네우마>를 이용해 물질을 창조하였고, 인간은 참된 지식인 그노시스를 얻음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왜곡된 신앙의 구조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바울이 추구하는 <이신칭의(Justification)의 구원신앙>이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완전한 희망적 신앙관>을 이루는 반면, <영지주의의 구원신앙>은 육체와 무관한 오직 영으로 얻는 <지식으로 구원받는다>는 불완전한 <절망적 신앙관>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참회록”이라 할 수 있는 고후 4:16~18과 너무나 흡사한 구약 성경말씀은 시편 116편입니다.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있으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시116:3).  그리고,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시116:8). 바울은 우리가 주목할 <초미의 관심사>를 죽음의 목전에 두고 있는 자신의 비참한 처지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처해 있는 <겉사람(Body)>과 <속사람(Non-Body)>의 경계선상에 있는 <주변인(Liminality)>, 혹은, <경계인(Marginality)>으로 이미 우리에게 본을 보이신 예수님의 결단력 있는 본을 따라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선택을 해야 하는 용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작금의 과도기적인 미국의 현실은 임기를 마치고 떠난 트럼프 정부와 새로운 임기를 바야흐로 막 시작한 바이든 정부와의 과도기(Transitional Period)에서 미국의 백성들은 마치 사도 바울이 겪었던 그 <주변인(Liminality)> 혹은, <경계인(Marginality)>의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이 현실을 직시하는 크리스천들은 분명한 선택으로 초미의 관심사인 시류에 편승할 것인가? 아니면, 영원의 세계로 거보를 내디딜 것인가? 겉사람을 선택할 것인가? 속사람을 선택할 것인가? 잠깐을 선택할 것인가? 영원을 선택할 것인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크리스천의 초미의 관심사는 마땅히 속사람이어야 하고, 영원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초미의 관심사)>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 우리는 <또 한 사람의 어거스틴, 엘리어트, 바울>, <작은 예수>가 되어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경계인, 주변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초미의 관심사가 영원을 바라보는 <속사람>에 있음을 확실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