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가 책갈피 속에 전화번호가 적혀있는 메모지를 우연히 발견했는데 어느 분의 전화 번호인지는 기억이 가물가물이다. 전화번호에 깃들어 있을 기억들이 궁금해진다. 전화 번호의 주인은 나라는 사람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함께했던 기억의 심연에 어떠한 질감의 행복이 숨겨져 있을까. 뜻밖에라도 기억이 되살아나기를 기다려볼 수 밖에. 기억은 추억을 품는 힘이 있어 생을 풍요롭게도 하고 생을 나락으로 밀어 넣기도 하지만 언제나 미화되고 윤색되거나 과장되기가 마련인 것 같다.
영화나 연극 분야에서 문학화의 각색 과정에서 다른 문헌의 소재를 작품의 줄거리로나 부분적으로 삽입하기 위해 채택하는 작업에서 각색의 절대성이 필수적임을 인정받은 범주임에 반해 일상중의 평범한 기억도 심심찮게 각색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인생 여정에서 만난 풍경들이나 때로는 관계에서 번져나는 사소하고 미미한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이 중간중간 재생된 필름처럼 떠오르는 기억들 마저도 무의식 중에 윤색되는 까닭은 어인 연유일까. 기억의 저장고가 과장되기도 하고 생략되기도 해서인지 고수하고 싶은 기억이라해서 특혜는 없는 것 같다. 스틸 한 장면들로 저장된 기억들이라서 특수 편집이 필요할 것 같다. 자기최면 같은 방법으로.
방역 차원에서 덤으로 얻어진 시간의 부피로 하여 추억을 건져 올리기 시작하면서 묵은 사진들을 꺼내보게 되었다. 기억의 심연은 기억의 흔적들을 불러들이나 보다. 여고 졸업 앨범까지 열어보게 만드는 것을 보면. 지금은 어디메서 어떻게들 지내고 있는지 그리운 친구들을 만난다. 이름 맞히기 게임이라도 하듯 사진 아래 있는 이름을 가리고 친구들 이름을 불러본다. 이상하리만치 대학 친구들 이름은 어렴풋하지만 여고시절의 같은 반 친구들은 거의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억의 조각들이 퍼즐 맞추듯 추억이란 상자에 보관되고 있었나 보다. 젊음 가운데를 가로지르며 좌충우돌에 겨를 없는 삶과 마주했던 동안에는 남기고 싶은 추억보다 앞날을 향한 구상과 생의 터전을, 기틀과 기저를 만드는 일에 동분서주했던 기억들로 채워져있다. 황혼녘에야 찬찬히 거두어 보는 기억들은 심한 바람에 나부끼는 이파리들처럼 이리저리 흐트러지고 조각보 모양새로 종잡을 수 없이 변환해 있음을 본다. 이웃들과 나누었던 정분도 짬짬이 연출되었던 틈새 사연들의 메모들은 용량 초과였는지 건망증 수치가 불투명한 한계선에서 서성이고 있다.
신기한 것은 아이들이 커가던 과정과정들은 윤이 나도록 매만져서인지 윤택한 빛이 흐를 만큼이다. 여하간의 과장도 미화도 없이, 엉뚱한 상상이나 윤색의 가미도 없이, 넘치는 수식이나 손질됨이 없는 원형을 유지한 각색없는 기억으로 잘 보존되고 있다. 간추리거나 다듬을 여력없이 앞만보고 달려온 흔적이 기억으로, 삶의 흔적으로, 역사가 되어 남겨져 있다. 인류의 역사가 있듯 가족의 역사로 보존되고 있다. 지금이란 시간이 있기까지의 결과가 현재요 현재의 이음줄의 결과가 내일이라서 가족이란 울타리의 바탕 위에 추억과 지금과 미래가 있는 것이라서 누구에게나 가족의 소중함은 각별한 것이다. 기억력이란 뇌의 전두엽 역할이 지대하다는 학자들의 연구결과를 어쩔 수 없다기 보다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현실이 되어버렸다. 육신도 군데군데 서서히 퇴행하기 시작하는데 정신줄인들 별수 있으랴 싶다. 구절구절 암기했던 성경도 이제금은 까무룩으로 가고있다. 냉장고 문을 열고는 왜 문을 열었지 한참을 생각하는 현상은 이미 고전이 되어버렸다.
시간의 물살에 실려가다보면 아마 젓가락을 들고 국을 퍼먹을 날도 머지 않은 것 같다. 이러다가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도 꽃잎이 낙화하듯 하나하나 잊혀질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나를 기억해주기를, 내가 나를 두고 바깥 나들이를 갔더래도 잊지 않고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기를 기도하고 있다. 기억은 때로는 우리를 저버리고 배역하기도 하지만 윤색된 착각은 우리네를 행복으로 이끌어 주기도 한다. 억지스럽지만 결국 인류는 모두 젊음에 머물러 있지 않음이라는 카테고리로 일관된다는 전제를 깔고 천연스럽게 걸어가고 있다.
행복의 척도 또한 얼마나 기억을 가감하고 윤색해내고 잔가지를 제거하느냐에 관건이 달려있다 해도 그리 억지는 아닐 것이다. 행복 또한 내가 만든 기준에 준하는 것이리라. ‘기억호’배를 타고 생의 여정을 시작한 항구에서 여러 기항지를 들리며 긴 기억의 여행을 다녀왔다. 다시금 기억이라는 크루즈를 타고 멀리로 보이는 등대 불빛을 따라 마지막으로 도착할 항구를 향해 출항을 시작했다. 기억의 심연은 깊고 깊어 건져 올리는 시간이 한참씩 걸리겠지만 윤색되지 않은 순수한 기억들을 수집할 수 있을 것이란 여망을 아직은 품고 싶다. 기억의 발화점이 폭죽처럼 한줄기 빛으로 뻗어 올라와 부풀듯 찬란하게 타오를지도 모를 것이라며 바램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기억의 심연 (深淵)에서 건져 올려질 추억들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