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목사님을 통해서 흥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한국인의 모습을 풍자한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어느 날 각 나라를 대표하는 열 사람이 배를 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배의 수용 인원은 7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원을 무시하고 10명을 태운 것입니다. 배가 한참 향해를 하다가 물이 스며들어오고 이 배가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세명을 이 배에서 내려놓지 않으면 이 배에 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죽음의 운명 앞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서로 눈치를 보면서 누가 양보를 해줄 것인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때 맨 처음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말합니다.
“여러분, 저는 대영제국의 국민입니다. 제가 신사도를 발휘해서 여러분을 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맨 먼저 다이빙을 해서 물 속으로 사라져 갔습니다. 그 다음에 또 누가 뛰어들 것인가를 눈치를 보는데 두번째 사람이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아메리카에서 왔습니다. 세계 최대의 강국인 제가 양보를 하지않으면 누가 하겠습니까?” 그리고 그 사람도 물속으로 뛰어 내렸습니다. 그 다음에 세번째 사람이 벌떡 일어 났습니다. 이 사람은 대한민국 사람입니다. 그리고 외치기를 대한민국 만세를 세번 외치고 나서 갑자기 옆에 있는 일본 사람을 쥐어 박더니 물속으로 밀어 넣었다고 합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드리는 이유가 우리는 해마다 3.1절이나. 8.15가 되면 일본인을 규탄하기에 열을 올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 만큼 자유인의 의식을 갖고 있습니까? 이러한 물음 앞에 우리는 민속사적 반성에 게을렸던 우리민족의 현실을 조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유를 말할 때보다 근원적인 의미에서의 자유를 자신에게 먼저 적용시켜 질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진정 자유하십니까? 시편 23편처럼 성경에서 많이 알려진 부분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시편 23편을 자유인의 시각에서 묵상해보신 일이 있으신지요? 이 시편 23편 가운데 죄악의 원인이나 혹은 결과를 초래하는 욕망, 혹은 방황, 두려움, 죽음 등 이런 것들로부터 참으로 자유했던 한 사람의 고백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시편 23편은 무엇보다도 먼저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를, 이 자유의 소중함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1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너나 할 것 없이 우리는 오늘의 삶의 거리에서 욕망의 포로가 되어버린 사람들을 숱하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욕망을 해결할 수 있는가. 이것은 인간이 직면하는 가장 중요한 실존적인 물음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욕망을 해결하는 문제에 있어서 두 가지의 접근 방법을 취했습니다. 하나는 욕망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욕망을 부인하거나 제거함으로 욕망을 버려야 인간은 참으로 자유로워진다고 합니다. 동양의 많은 종교와 철학들이 이런 금욕 주의적인 접근 방법을 통해서 인간에게 욕망의 부인을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욕망을 부인하려고 해도 내 의식의 밑바닥 속에서 이 욕망은 다시 솟아 오릅니다. 이래서 인간의 피곤한 욕망의 행렬은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접근 방법으로 인간들은 욕망을 충족시킴으로써 욕망을 해결하려는 방법을 시도해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어떻게 욕망을 채울 수 있는지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욕망을 해결하려면 또 하나의 욕망이 찾아오고 이래서 욕망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문제에 관해서 어떤 접근 방법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욕망을 제거함으로써 욕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낙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은 욕망을 모두 충족시키라고도 않습니다. 굳이 말하지면 이 욕망에 대한 근원적 충족이 가능하다고 우리에게 우리에게 소리칩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나의 욕망을 구체적으로 해결하는 문제보다 이 욕망에 대한 근원적 충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방법이 바로 우리의 모든 필요의 해결자이신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자기의 목자로 삼았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