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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은 사라지고 와인은 남았다

지역뉴스 | 라이프·푸드 | 2021-01-15 09:09:30

와인,라이프

구양숙 부동산표정원 융자

1991년 12월 26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즉 소련이 해체됐다. 당시 이 소식을 신문 기사로 접한 필자는 다소 혼란스러웠다.‘세계 최강’ 미국에 한 치의 주저함 없이 맞서 냉전 시대를 호령하던 거대 소련이 이렇게 한순간에 해체되어버린단 말인가.

최근 중국의 무인 탐사선이 달 표면의 샘플을 채취해 돌아왔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문득 소련이 생각난 터였다. 필자의 기억 속 소련은 과학이 발달한 나라였다. 특히 우주과학은 미국을 질투심과 위기감에 사로잡히게 만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소련은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쏘아 올렸다. 1961년에는 인류 최초의 유인 우주선 보스토크 1호에 유리 가가린을 태우고 궤도에 올렸다. 그가 우주에서 지구에 보낸 말은 다시 봐도 가슴이 벅차다.“지평선이 보인다. 하늘은 검고 지구의 둘레에 아름다운 푸른색 섬광이 비친다.”

국가가 해체된 마당에 그들의 과학기술은 어떻게 됐을까. 그 행방을 궁금해하던 참에 필자는 그 강성하던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뒤의 와인의 행방을 떠올렸으니, 이것도 참 병이다. 그러니 거창한 우주과학은 접어두고 이제 로마제국으로 가보자.

 

은 건국할 때부터 서로마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약 1,200여 년 동안 와인 문화와 산업을 이민족에게 배우고 익혔다. 거기에 멈추지 않고 이를 발전시키더니 와인에 관한 한 세계 최고 수준에 올랐다.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을 당한다. 그의 유언장에 따라 옥타비아누스가 후계자가 된다. 그는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았고, 로마는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바뀌었다. 로마는 승승장구했고 와인 산업 역시 거듭 발전했다. 칼리굴라나 네로 같은 폭군이 등장해 내분도 겪었지만, 다섯 명의 현명한 황제가 연달아 나와 태평성대를 누렸다.

오현제 시대 때 로마의 영토는 최대로 확장됐다. 동서남북으로 뻗은 광활한 땅 곳곳에 와인 생산지가 있었다. 속주들과 활발하게 무역을 한 덕분에 누구나 와인을 마실 수 있었다. 바로 이때가 팍스 로마나, 곧 ‘로마에 의한 평화’라는 뜻의 시기다.

다만 ‘오랜 평화’라는 말은 로마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얼마나 나른한 낱말의 나열인가. 로마는 더이상 영토를 확장하지 않았을뿐더러 달콤하기 그지없는 나른함이라는 바다에 가라앉고 말았다. 폭풍이 오기 전 가장 잔잔하다는 그 바다에 말이다. 파멸의 싹은 그 심연에서 자랐으니, 오현제 시대가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여러 문제가 터져 나왔다.

첫째, 빈부격차가 심화했다. 귀족은 갈수록 더 많은 땅을 차지하더니 대농장을 운영해 더 부유해졌다. 자영농은 그나마 가진 땅을 귀족에게 팔아야 했고 정착지마저 떠나 빈민으로 전락했다. 자영농이 줄다 보니 국가는 세수를 확보하기 어려워 화폐를 계속 찍어냈다.

곧 인플레이션으로 물가가 폭등하자 민심이 동요했다. 엎친 데 덮친다고 전염병마저 돌았고 사산조페르시아와 게르만족이 침략해 약탈까지 일삼았다. 황제는 폭동이 일어날까 두려웠다. 로마시민에게 빵과 와인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콜로세움에서 잔혹한 검투사 시합을 열어 무료관람 티켓을 뿌리며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우려 했다.

둘째, 로마의 경제를 떠받치던 노예 수가 급감했다. 로마는 전쟁 포로를 데려와 노예로 삼았다. 그런데 전쟁이 줄자 노예 공급이 달렸고, 노예 가격이 열 배까지 치솟았다. 노예노동을 기반으로 운영되던 대농장은 곤란한 상황에 직면했다. 지주들은 노예 대신 빈민들에게 소작을 주고 수확의 3분의 1을 받았다. 소작농들은 자유민이긴 했지만, 허가를 받아야만 이동할 수 있어 노예나 다름없었다. 이러한 대농장을 ‘콜로나투스’라고 한다. 로마의 와인은 이때부터 소작농들이 농사지은 포도로 만들어졌다.

셋째, 로마군단이 몰라보게 약해졌다. 빈부 격차가 심화하자 시민이 빈민으로 전락해 군대 지원자가 줄었다. 게다가 병사들에게 제때 급료를 주지 못할 정도로 국고가 텅 비었다. 병사들의 불만이 쌓이자 장군들은 이들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급기야 혼란을 틈타 군인이 황제가 되더니 50년 동안 26명의 황제가 뒤바뀌는 사태도 벌어졌다.

넷째, 종교 갈등이 고조됐다. 다신교를 믿는 로마제국에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황제 숭배를 거부했다. 제국은 기독교인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네로 황제가 대표적이다. 탄압이 얼마나 심했으면 성경에도 등장할까.

그러다 잠시 ‘봄날’이 오는 듯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아타나시우스파의 교리를 정통으로 채택한다. 수도를 로마에서 동방의 비잔티움으로 옮기고는 자신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폴리스라 명명했다. 통일된 종교와 천도로 민심을 다잡고 다시 한번 로마를 일으키려 했다. 후대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더 나아가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고 로마를 동로마와 서로마로 나누어 제 아들들에게 물려준다.

기독교가 공인되고 국교로 승인되자 와인 수요가 늘었다. 성찬식 등 기독교의 예식에 와인이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때의 와인 산업은 그야말로 금광의 노다지였다.

다섯째, 게르만족이 로마제국으로 대거 침범했다. 원래 게르만족은 북유럽에서 농경이나 목축을 하며 살았다. 인구가 늘고 농경지가 부족해지자 이들은 남쪽으로 이동해 라인강 동쪽에 자리를 잡았다.

라인강 서쪽의 켈트족은 동쪽에 이주한 서고트족, 동고트족, 반달족, 부르군트족, 프랑크족, 앵글로색슨족 등을 통틀어 ‘게르만족’이라 칭했다. 이들의 땅은 ‘게르마니아’라 불렸다. 로마인들이 이를 그대로 사용해 명칭이 굳어졌다.

이들 가운데 서고트족은 로마의 국경 관리가 허술해지자 국경을 넘나들며 약탈했다. 그러다 훈족(흉노족)이 침입하자 로마에 들어가 살게 해달라고 청했다. 로마 황제는 이를 허락했다. 로마는 이들을 대농장의 일꾼이나 용병으로 고용했다. 처음 이들은 하급 관리나 용병으로 활동했지만, 나중에는 고위 관리나 장교가 되기도 했다. 장군이 되어 큰 공을 세운 이도 나왔다.

당시 중앙아시아에서 몰려온 훈족의 기세는 대단했다. 여러 게르만 민족은 훈족을 피해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서고트족은 이베리아반도에, 반달족은 아프리카에, 부르군트족은 프랑스 중부에, 앵글로와 색슨 족은 영국에, 프랑크족은 프랑스 북부에, 동고트족은 이탈리아반도에 자리를 잡았다. 이들이 이동한 약 200여 년 동안의 사건을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라 한다. 이 사건은 로마를 위험에 빠트린다. 게르만족이 이동해간 곳은 모두 로마제국의 영토였기 때문이다.

서로마제국은 결국 476년에 게르만 출신의 로마 용병 대장 오도아케르가 로마 황제를 폐위시킴으로써 멸망했다. 서로마제국에 자리 잡은 게르만 민족은 각자 왕국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건장한 체격에 푸른 눈동자와 금발이라는 오늘날 유럽인 이미지는 바로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바야흐로 유럽에 게르만의 시대, 곧 중세가 시작된 것이다.

로마인은 게르만족을 보고 야만인이라며 업신여겼다. 와인을 대하는 게르만족의 태도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이들은 로마인처럼 와인을 물에 희석해 마시지 않고 원액을 그대로 벌컥벌컥 들이켰기 때문이다. 또 로마인이 보기에 ‘문명인의 술’인 와인보다는 ‘야만인의 술’인 맥주를 이들이 즐겨 마신 까닭도 있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고 한다. “게르만족은 와인을 마시면 여자처럼 약해질까 두려워해 수입조차 꺼렸다.” “게르만족은 켈트족과 달리 문명화시킬 수 없는 구제 불능의 족속이니 국경 밖으로 쫓아내야 한다.” 18세기에 ‘로마제국쇠망사’를 남긴 에드워드 기번 역시 게르만족을 탐탁지 않아 했다. “게르만족은 맥주라는 술에 중독되었는데, 이탈리아산과 갈보리산 와인을 맛본 뒤로는 그 아찔한 맛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독한 술에 취해야 직성이 풀리는 이 야만인들은 탐나는 보물이 있는 지방을 손에 넣지 못해 안달을 냈다”라며, 게르만족이 와인 때문에 로마를 침략했다고 했다.

카이사르나 기번이 냉소를 보낸 야만인들이 서로마제국의 영토를 장악했으니, 과연 와인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당시 게르만족은 식자가 드물었던 탓에 남긴 기록이 거의 없는 형편이다. 그나마 전해지는 기록은 로마인의 시선으로 작성된 것이라 대부분 왜곡됐다. 게다가 그즈음엔 와인 보관이나 운반에 ‘나무’통을 사용한 ‘탓’에,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는 나무통이 모두 썩어 없어지고 말았다.

안타깝게도 당시의 와인과 관련해서는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5세기부터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 마무리된 7세기까지 약 2세기 동안은 와인 관련 기록이 없는 암흑시기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 지역의 와인이야말로 전 세계 최고가 아니던가. 기록이 없을망정 우리가 모르는 세월 동안 와인은 유구히 이어져 왔다.

최근까지는 게르만족이 야만인답게 포도밭을 황폐화했을 거라고, 그나마 기독교 지도자인 주교들이 와인을 지켜낸 덕분에 와인이 오늘날까지 이어졌을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 주장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고 게르만족이 서유럽을 장악하면서 잠시 와인 산업이 주춤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이는 게르만족이 와인 산업을 억압했다기보다는 제국의 붕괴로 인한 충격파 탓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로마라는 가장 큰 와인 시장이 사라졌고, 제국의 빈자리에 새로운 나라들이 들어서면서 국내외 와인 유통과 무역 질서가 송두리째 흔들렸을 테니 말이다.

훗날 기록된 서고트족 법전에는 “포도밭을 훼손하는 자는 엄벌한다”라는 조항이 있다. 고트족 출신의 포르투갈 대왕은 자신의 포도밭을 수도원에 하사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를 볼 때 잠깐의 혼란기를 거친 뒤에는 오히려 게르만족이 포도밭을 보호하고 와인 산업을 장려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사실 게르만족은 이미 3세기부터 로마제국 영토를 넘나들며 로마와의 대립각 속에서 로마에 동화되기도 했다. 당시 포도 재배지는 센강, 욘강, 루아르강 등지와 게르만족이 많이 거주한 트리어 인근의 모젤강 지역에도 있었다. 그런 만큼 이들이 와인의 문화 경제적 가치를 모를 리는 없었다. 더구나 와인은 ‘돈 되는’ 산업이 아닌가. 술을 좋아한다는 게르만족이 와인을 장려했으면 했지 억제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러고 보면 나라 이름이 바뀌든 그 주인이 바뀌든, 과학기술이나 문화는 물꼬를 트고 어디론가로 흘러 알맞은 환경 ‘테루아르’를 만나 다시 꽃을 피우는 듯하다. 암흑의 우주 공간을 건너 달에서 지구로 온 예의 표본처럼, 암흑시기를 도도히 흘러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적셔주는 와인처럼 말이다.

 

제국은 사라지고 와인은 남았다
제국은 사라지고 와인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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