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의 콘스탄틴 비질 게오르기우(Constantin Virgil Gheorghiu)가 남긴 명작, <25시, La Vingt-cinquième Heure>는 평범한 청년 농부 <요한 모리츠>의 비극적 삶을 예리한 작가의 영감으로 그려낸 <시사적인 소설>입니다. <2차 대전의 사생아, 청년 요한의 절망적인 삶>은 20세기를 뛰어넘어 지금 <코로나19>로 인하여 절망적인 시대의 참담함을 피부로 절감하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전이되고 있습니다.
<25시>가 시사하는 것은 하루의 24시간이 모두 끝나고도 영원히 다음날 아침이 오지 않고 아무도 구원해줄 수 없는 <최후의 시간>을 의미하며 <현재의 시간>을 뜻하는 것입니다. 25시의 주인공, <요한 모리츠>가 겪었던 비운의 인생굴레는 단순히 한 청년의 비극이 아니라, 시편 57편에 등장하는 <믿음의 영웅, 다윗>에게도 동일한 절망의 그림자가 오버랩 되는 것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걸어갔던 인생의 궤적은 결코 탄탄대로의 꽃 길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의 주변에는 항상 시기와 질투와 모함을 일삼는 적들에게 에워싸여 있었습니다. 그의 삶을 한마디로 지적하자면 <25시의 요한 모리츠 콤플렉스>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절망의 굴레와 적들로 인한 어두운 그림자의 연속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마음을 오직 하나님께만 올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편 57편과 시편 108편에서 다윗은 그의 마음을 <Sola Deo,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것을 확연히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나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57:7~8)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나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그리고, 결정적인 다윗의 마음의 쐐기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그의 신앙고백인 시편 62:2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지금의 시대 트렌드는 <New Normal Complex>로 혼돈과 좌절의 참담함을 통절히 절감하고 있습니다. <뉴노멀, New Normal>은 시대 변화에 따라 새롭게 부상하는 기준이나 표준이라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뉴노멀은 경제학 용어로 2007년~2008년의 세계금융위기와 2008년~2012년까지 이어진 경제침체기간 동안 만들어진 새로운 <경제적 기준>을 말합니다. 뉴노멀시대의 3저현상, <저성장, 저금리, 저물가>의 부정적인 성향은 Covid-19의 장기화 조짐에 따라 <Un-tact Business, 비대면 비접촉문화>의 새로운 경제 트렌드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25시의 요한 모리츠>가 체감하였던 절망의 악순환의 연속입니다. 게오르규가 목격하였던 20세기의 암울한 시대의 절망상황과 이스라엘 역사의 한복판에서 이미 맛본 <다윗의 시대적 절망상황>과 오늘날 코비드19로 인한 <뉴노멀 트렌드의 절망상황>은 ‘인간사회는 끝없는 절망과 연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여야 합니다.
무엇이 이 세상 문제의 원인인가요? G.K. 체스터튼은 책임 전가하려는 21세기의 포스트모더니즘시대, 적폐 청산하려는 현 세대들에게 아주 짧고 명료한 <세 단어>로 그 원인에 대한 해답을 명쾌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문제입니다(Dear Sirs, I AM).” 사람들은 언제나 문제의 쟁점을 “External Myself(나 외의 외부적 요인)”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다 보니, 언제나 절망의 굴레, 좌절의 끝없는 허무 속에서 <탈현실>, <탈상황>의 오류를 번복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가져온 격리 콤플렉스, 저성장, 저금리, 저물가의 침체 콤플렉스를 가져온 뉴노멀 트렌드, 25시의 절망과 허무>. 이 모든 불리한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암울한 시대를 이길 수 있는 길은 <다윗의 중심,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가,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는 용기의 일어섬이, 중심의 거듭남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