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권 투쟁 산 증인 암 투병중 사망
학생운동, 워싱턴행진, 셀마행진 참여
의회 '양심'으로 불리며 시민권 향상
마틴 루터 킹 목사와 함께 1960년대 민권운동을 이끌었던 마지막 생존 지도자 존 루이스 연방하원의원(민주, 조지아5지역)이 지난 17일 8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는 지난해 12월 췌장암 4기 진단을 받았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그는 투병 사실을 알리며 ″나는 거의 평생 동안 자유, 평등, 기본적인 인간의 권리를 위한 투쟁을 해왔다”며 ”지금의 이런 싸움은 처음이다”고 전했다.
1940년 2월21일에 앨라배마주 트로이 외곽의 한 소작농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흑인 전용 공립 학교를 다녔다. 1955년 몽고메리 버스보이콧 운동,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연설에 고무된 루이스는 민권 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심하고, 이후 평생을 투표권 쟁취를 비롯한 흑인 인권운동에 매달렸다.
루이스는 대학 재학 중이던 시절 테네시주 내슈빌의 분리 식당에서 연좌농성을 조직했다. 21세이던 1961년에는 남부 인종 분리 정책에 항의해 일부러 백인 전용 좌석에 앉는 ‘프리덤 라이더스(Freedom Riders)’ 운동에 참여했다. 루이스는 또 ‘비폭력학생조정위원회(SNCC)를 설립하고, 시민권 운동의 정점이었던 1963년부터 1966년까지 회장을 지냈다.
루이스는 23세이던 1963년 8월에 열린 ‘워싱턴 행진‘에서 최연소 연사로 나서기도 했다. 1965년 3월, 앨라배마주 셀마의 에드먼드 피터스 브릿지에서 열린 ‘셀마 행진‘에서 루이스는 600여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투표권을 요구하는 평화 시위를 벌이던 중 앨라배마주 경찰에 의해 두개골 골절상을 입었다. ‘피의 일요일’으로 불리게 된 이 사건의 잔혹성은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이 행진은 그 해 투표권법 통과의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루이스는 1981년 애틀랜타 시의회 의원으로 선출됐고, 1986년에는 연방하원의원에 당선됐다. 의정활동 기간 동안 그는 시민권을 확장하는 법안을 도입하는 일에 매진했고 의회의 ‘양심’으로 불렸다.
그는 2018년 조지아주 주지사 선거에서 낙선했던 스테이시 에이브럼스(민주당)의 선거운동을 도왔다. 루이스는 지원 유세에서 ″제가 53년 전에 셀마의 그 다리에서 약간의 피를 흘렸다”며 ”피를 흘려달라고 요청드리는 게 아니라 절박한 마음으로 투표에 참여해달라고 요청드리는 것”이라고 호소했다.
루이스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피하지 않으며 날선 각을 세웠다. 2019년 12둴 트럼프 탄핵안 표결을 앞두고 그는 ″옳지 못하고, 정당하지 못하고, 공정하지 못한 일을 목격하면 무언가 해야 할 도덕적 책무가 있는 것”이라며 ”우리 자녀들과 손주들은 ‘그 때 무엇을 하셨나요? 무슨 말을 하셨나요?’라고 물을 것이다”고 연설했다. 조셉 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