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활동하다 지난 7일 향년 97세로 별세한 원로화가 김보현(미국명 포 김) 화백의 장례식이 18일 구겐하임 미술관의 피터 루이스 시어터에서 엄수됐다.

장례식에는 유족 대표인 김 화백의 조카 케이조 다카하시(한국명 김경삼) 씨를 비롯해 장례위원회 위원장인 조영 포김 앤 실비아월드 미술재단 이사와 토마스 허버드 코리아소사이어티 이사장·손세주 뉴욕총영사·김원수 유엔 사무차장·이우성 뉴욕 한국문화원장 등 장례 위원을 포함해 300여명이 참석해 김 화백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김 화백의 형의 아들인 케이조 씨는 "다섯 살 때 뵀는데 잘 기억이 안 난다"면서도 "어머니께서 작은 아버지(김 화백)가 순수한 마음의 소년이 어른이 된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밝혔다.

윤삼균 코리안헤리티지재단 회장은 "올해 9월 워싱턴DC에서 전시회를 하실 계획이었는데 아쉽다"면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림을 그렸고 전 재산을 지역사회에 기부했다"고 고인을 돌이켰다.

윤 회장은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림을 못 그리는 게 문제'라고 했던 김 화백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고 덧붙였다.

1917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난 김 화백은 일제강점기에 태평양미술학교를 다니고 1946년 귀국해 조선대 예술학과를 창립한 조선대의 첫 전임교수였다. 해방 전후 이념 대립 속에서 두 번은 좌익 혐의로, 두 번은 우익 혐의로 몰리는 등 양쪽에서 핍박받자 1955년 일리노이대 교환교수로 미국에 건너왔다.

그는 도미 초기 힘들게 살았지만 한국에서의 옥살이와 고문 기억 때문에 30여년간 한국사회와 연락을 하지 않아 한동안 한국에서는 '사라진 화가'였다.
하지만 그는 1992년 인사동에서 개인전을 열고 1995년 예술의 전당에서 회고전을 하면서 고국에 자신의 존재를 다시 알렸다.

2007년 회고전을 앞두고 한 인터뷰에서 "나는 영원한 현역"이라고 강조했던 그는 백수(白壽)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으며 100세 기념전도 준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재작년부터 신장 투석을 하느라 고생한데다 최근 감기에 기관지염이 겹쳐 기운을 차리지 못했고 심장마비 증세로 입원했다가 운명했다.
미국에서는 자신과 부인의 이름을 딴 '월드 앤 김 갤러리(Wald and Kim Gallery)'를 열어 재미 한국 미술가들을 위한 전시 공간도 제공했다.
부인 월드 여사는 2011년 3월 노환으로 별세했고 슬하에 자식은 없다.
발인식은 19일 오전 프랭크 캠벨 장례식장에서 있다. 이곳은 2006년 1월 백남준의 장례식이 열린 곳이기도 하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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