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제 2차 세계대전 직후 시기에 세계 문제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 대란에서 승리를 거두고도, 본토가 전화를 입지 않은 이 나라는 국내외에서의 미국의 사명을 확신하고 있었다. 미국 지도자들은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수호한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기를 원했고, 번영의 혜택을 가능한 한 널리 나누기를 원했다. 시사주간지 <타임>(Time)의 발행인인 헨리 루스와 마친가지로 그들에게는 이 시기가 "미국의 세기"였다.


 20년 동안 대부분의 미국민들은 이러한 자신만만한 접근방식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들은 1945년 이후 전개된 영토 중에 소련에 대해 강력한 자세를 취해야 할 필요성을 인정했다. 그들은 정부권능의 증대를 찬성했으며, 뉴딜정책 실시 기간 중에 처음으로 명백히 확립한 부강한 국가의 대망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미국에서 새로운 수준의 풍요를 창출한 전후 번영을 즐겼다. 


그러나 차츰 일부 미국민들은 미국생활에 관한 주된 가정들을 의문시하기 시작했다. 갖가지 면에서의 도전은 국민적 합의를 깨뜨렸다. 1950년대에 아프리카계 미국민들이 '미국의 꿈'의 보다 큰 몫을 차지하기 위해 강력한 개혁운동을 시작했는데, 이 운동에는 후에 기타 소수민족들과 여성들이 참여했다. 1960년대에 정치적으로 행동적인 학생들이 해외에서의 이 나라의 역할, 특히 정신적으로 좀먹어들어가는 월남전에서의 현장유지에 도전했다. 각계각층의 미국민들이 미국에서 새로운 평형를 이루려고 노력했다.



냉전의 목적

냉전은 전후 초기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문제였다. 냉전은 소련과 미국 사이에 장기간 존속되어온 의견 불일치로부터 생겼다. 1918년 미군은 볼셰비키 세력을 위해서 연합국의 러시아 개입에 참가했다. 미국은 1933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볼셰비키 정권을 외교적으로 승인했다. 그때에도 의구심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이 두 나라는 서로 연합하고 있었으므로 나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그들의 의견차이를 무시했었다. 

대전이 종결되었을 때 그들의 적의는 또다시 표면화되었다. 미국은 미국의 자유, 평등, 민주주의 등의 개념을 다른 나라들과 함께 하기를 바랐다. 여타 세계가 내란에 시달리고, 제국들이 붕괴되는 동란속에 있었으므로 이 나라는 평화로운 재건을 가능하게 해주는 안정을 제공하기를 바랐다. 세계 대공황의 망령을 잊을 수 없는 미국은 당시 미국이 익숙한 자유무역 견해를 키웠으며, 미국의 잉여 농산물 및 공산품을 위한 판로를 창출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서유럽 국가들의 경제성장을 촉진시키고, 그들의 경제를 재건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서유럽 국가들의 수출 능력을 보장해주기 위해서 무역 장벽을 없애려고 노력했다. 무역장벽의 감축은 미국 내외에서 경제성장을 촉진시키고, 미국의 우방국 및 동맹국 내에서의 안정을 뒷받침할 것이라고 믿어졌다. 


소련은 자신의 과제를 가지고 있었다. 러시아의 강력히 중앙 집권화되고 독재적인 통합의 역사적인 전통은 미국의 민주주의강조와 대조가 되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데올로기는 대전 중에 중시되지 않았지만, 여전히 소비에트 정책의 지침이 되어있었다. 소련 국민이 1,000만명이나 사망한 전쟁으로 해서 황폐화된 소련은 자국을 재건하고, 또 다른 이러한 가공할 전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었다. 소련은 특히 그들의 영토에 대한 서방측으로부터의 또 다른 침공을 염려하고 있었다. 히틀러의 침공을 물리친 그들은 또다른 이러한 침공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작심하고 있었다. 당시에 소련은 방어 가능한" 국경들과, 동유럽에서 소련의 목적에 동조하는 정권들을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은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그리고

중부 및 동유럽의 기타 국가들의 독립 및 자치를 회복시키는 일은 미국의 전쟁 목적 중의 하나였다고 계속 선언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