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이민 나이를 가지고 함께 아이들을 키워왔었다. 아이들이 같은 학교를 다녔기에 오랜 지인의 관계를 이어왔었는데 년전엔 부인을 장지에 남겨두고 어제는 그 남편되시는 분을 흙 속에 남겨두고 발걸음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위암으로 고생하시다 떠나신 부인을 그리워하다 외로움의 견딤 끝에 삶의 줄을 놓아버리신 것이다. 죽음이란 늘 예고 없이 찾아 오는 것이긴 하지만 가족들이 얼마나 당혹했을까.

장지를 떠나오면서 갑자기 죽음이 찾아 오더라도 가족들로 하여금 적어도 떠나는 자로써의 최소한의 준비 된 마음을 보여 줄 수 있는 남김이 있어야함을 절감하게 되었음은 죽는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 아니란 것이었다.  죽음 뒤에 남아 있을 가족과 지인과 친지들에게 남겨질 흔적들은 어쩔것인가. 높이 살만한 업적들을 한아름씩 남기고 떠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최소한의 주변 정리는 해 두는 것이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배려라 할까 예절이 아닐까해서이다.

추운 겨울이 닥쳐 올 것을 대비하여 김장도 준비하고 외투며 내의며 겨울 초입에 미리 월동 준비는 서두르면서 죽음에 대해 무심해서 일까 애써 무심하려 하는 것일까. 소홀하거나 아니면 아예 필요성 조차도 무시 해버리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빨리 죽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과  오래 살것이라는 바램과 믿음 때문에 아마 죽음을 방관하며 살아가지 않을까싶다. 인생노정의 마지막 모습을 어떻게 보내야 할것인가를  준비해야 할것이다. 언젠가 맞게 될 죽음에 대해 틈틈이 생각하고 준비된 마음을 가지기 위해 먼저 죽음을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얼떨결에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분들을 뵐 때 마다 이 세상을 언제 떠날 지 모른다는 사실을 잊고 살아오신듯 하여 살아 움직이는 삶의 자리에서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가는 죽음을 준비하는 지혜와 인간으로써의 존엄함을 누려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토로하고 싶어진다.

많은 나이에 제자의 잔칫집에서 포식한 뒤 아무도 모르게 세상을 등진 철학자 플라톤이나 삶의 이유와 삶의 처음과 끝을 찾아 생을 보낸 끝에 살아야 하는 뜻을 잃은 채 나그네로 떠다니다가 위병을 얻어 쓸쓸히 세상을 떠나간 아리스토 텔레스의 나그네 삶도 죽음을 맞이 할 준비는 어떠하였을까. 철학을  즐겨하다 종국엔 허무와  종말을 발견하고 생의 절망을 깨달은 파스칼이나 키에르 케고오르 와  니이체도 준비된 죽음을 맞이 할 수 없었거니와  괴에테는 영원한 빛을 그리워 하면서 마지막 까지 빛이 그립다는 말을 되뇌이다 죽어갔다고 한다.  부귀와 영광을 누렸으며 역대의 왕중 가장 지혜로웠던 솔로몬도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고 하지 않았던가.

떠나시는 분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면서 살아오신  삶의 영상이 떠올랐다. 떠나시는 분을  그리워하며 울어줄 사람을 남기고 가는 것 또한 아름다운 삶을 일구며 고운 흔적을 남긴 사람에게만 남겨진 축복이리라. 태어날 때도 빈 손이었으매 돌아 갈 때도 빈손으로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도록 주변을 정돈하고 아낌없이 다 나누어주고 갈 수 있는삶. 죽음이라는 것과 마주 했을 때 삶의 한 부분이라는 느낌으로 맞이 할 수 있도록 죽음에 대한 이질감으로 부터 벗어나는 것도 평소에 준비 되어져야 할 것이리라.

죽음을 깊이 이해하고 바른 정의를 가지고 사는 자는 일상에서도  평안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은 결코 지금의 삶과 별개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누구에게나 삶의 마침표가 있다는 사실 앞에 죽음은 달갑진 않지만 인생의 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살아 숨쉬는 순간의 소중함도 인연의 소중함도 살아있으매 고난과 기쁨 미움과 사랑 나눔과 간구의 시간들이 삶을 이루어내고 있는 조각들이었음을. 이 조각들이 만들어 낸 삶에 새겨진 무늬들을 삶을 마무리하는 순간 죽음에 새겨진 무늬들로 소중하게 가지고 갈 수 있는것도 진리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선물이리라.

버나드 쇼우의 묘비명에는  - 우물 쭈물 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 - 로 새겨져 있다한다. 이런 묘비명을 남기진 말아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