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 권명오
수필가·칼럼니스트
Ⅰ한국 38년(69)
이민병
윤복현 선생님은 내 인생의 진로를 결정해 주신 은사님이시다. 부모나 다름이 없는 그런 분인데 졸업 후 한번도 찾아 뵙지 못해 죄송하게 생각했다. 약속 장소인 고관성 치과 원장도 선생님이 가장 아껴온 제자였다. 사제지간 세사람이 오래간만에 만나 저녁을 함께 한 뜻 깊은 자리인데 선생님은 식사가 끝나자 느닷없이 “나 내일 모래 브라질로 이민을 가네” 하시면서 중 고등학교 교감의 월급으로는 두 아들을 대학까지 가르칠 방법이 없어 고민을 거듭 한 끝에 더 늙기 전에 아들의 교육을 위해 보다 더 넓고 큰 세상으로 꿈을 펼쳐 보기로 했다고 하셨다.
상상 할 수 없는 선생님의 말씀과 결단에 놀라 할 말을 잃었다. 청렴 결백한 선생님이라 이해가 됐지만 내 귀를 의심 할 정도였다. 윤복현 선생님은 부족한 점이 너무나 많은 나를 사랑하고 아끼고 보살펴 주셨고 배우와 텔런트가 되게 하고 계속 후원해 주시고 국립극장에서 연극을 할 때는 남모르게 사모님과 함께 연극을 관람하고 가시곤 했던 은사님께서 머나 먼 브라질로 이민을 가신다니 믿을 수가 없다. 다음날 아내와 함께 마지막 인사 차 선생님의 임시 거처를 찾았다. 선생님은 세상사에 대한 이런 저런 다정하고 박식한 이야기 끝에 "젊은 사람들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도전을 해볼 필요가 있다며 직장을 구할 수 없는 작고 좁은 가난한 대한민국, 인구 밀도가 높은 나라를 떠나 크고 넓은 세계로 나가 새로운 대망의 꿈을 펼쳐 보는 모험이 자신과 조국의 미래를 위한 애국의 길이 될 것이다” 라고 하셨다.
선생님과 기약 없는 작별을 하고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아내에게 우리도 이민을 갈까 했을 때 아무 대답이 없던 아내는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고 했다. 왜냐하면 남편이란 사람이 한번 하겠다고 하면 하고야 마는 별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나는 이민병에 걸리고 말았다. 선생님이 옮겨준 이민 바이러스가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브라질에 정착하신 선생님께선 성공적이고 희망적인 희소식을 전해 왔고 나는 이민을 결심했노라고 답을 보냈다. 그 후 선생님은 브라질에 대한 여러가지 정보와 이민에 대한 필요한 모든 준비사항을 상세히 설명해 주시고 이민 수속 절차도 알려 주셨다. 선생님 말씀대로 해외개발공사를 찾아가 브라질 농업이민 신청을 했고 곧 바로 브라질어 ( 포르트게스)를 배우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쌍파울로에 중대부고 (구 낙양공고 )제자들이 봉제업으로 성공을 해 시장을 장악하고 있어 양재학원 원장님이셨던 사모님과 선생님은 봉제업을 시작해 쉽게 정착을 하셨다며 아무 걱정 말고 브라질어와 봉제 기술을 배우라고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