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연방정부 예산적자를 억제하려는 부시 행정부의 노력은 문제를 보다 많이 안고 있었다. 어려움을 발생시킨 한 원인은 상호신용금고업의 위기에 있었다. 사기, 경영실책, 엄격하지 않은 규정, 그리고 1980년대 초엽 및 중엽의 미국의 특정 지역들의 경제적 하강 등으로 해서 상호신용금고들의 채무변제 불능(파산) 현상이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1970년대 말엽에 존재하던 3,100여개의 이러한 기관들 중에서, 


1990년 6월 30일 현재까지 존속된 기관들은 2,453개에 불과했다. 1993년에 이르러, 파산한 저축기관들의 매각비 및 정리비 총액 -이들 기관의 예금에 대한 지불보증은 정부가 해주었음- 은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즉, 3,000억 달러 내지 5,000억 달러에 달했었다. 1990년 1월 부시 대통령은 그의 예산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민주당은 행정부 예산안이 너무나 낙관적이며, 적자감축 원칙을 실행하자면 증세와 아울러 방위 지출의 격감이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예산 협상은 지연되었으며, 6월에 이르러 -부시 후보가 선거운동 중에 증세가 없을 것임을 약속했는데도 불구하고- 부시 대통령은 국가경제의 변화하는 상황은 증세가 포괄적인 예산안의 일부가 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고 의회 지도자들에게 말했다. 


예산안에는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경기후퇴 현상, 상호신용금고업 구출 작업으로 해서 생긴 손실액, 그리고 메디케어(고령자 의보제도) 및 메디케이드(저소득자 및 신체장애자 의보제도)를 위한 보건비 증대 등이 한데 뭉쳐서 모든 적자 감축, 조치들을 상쇄하고, 1991년도에 적어도 전년도(1990)만큼의 적자를 만들어 냈다.



냉전의 종식



1980년대 말엽의 초강대국들의 관계는 동유럽의 정치적 소요의영향을 받았다. 민주적 개혁을 위한 민중 폭동의 결과로 그 지역 전역의 공산주의 정부들이 몰락하는 것을 미국과 세계는 지켜보았다. 


1989년 부시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말타섬에서 개최한 미소 정상회담은 성공적이었지만, 1990년에 미소 관계에서 이루어질 비상한 업적을 예언할 수 있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부시 대통령은 1월의 그의 연두교서에서, 유럽 주둔 미군을 19만 5,000명으로 감축할 의도를 발표했다. 2월에 부시 행정부는 군비통제와 동서독 통일에 관해서 소련과 협의했다. 7월 이내에, 소련은 갖가지 2국간 협의와 다자간 협의를 한 후에 소련의 전시 권리들을 포기하고, 나토(북대서양 조약기구)의 정식 회원국 자격을 가진 통일독일을 수락했다. 독일에 관한 "최종해결 조약"(The Treaty on the Final Settlement)이 9월 12일 모스크바에서 조인되었다. 


유럽 안보협력회의(CSCE)의 3일간의 정상회담에서, 1990년 11월 19일 부시 대통령과 21개국 국가수반들은 '유럽 주둔 재래식 군대(CFE)에 관한 조약'에 서명했다. 이 CFE 조약은 나토와 구바르샤바 조약기구 국가들이 대서양에서부터 우랄산맥에 이르기까지 배치해놓은 수천 대의 탱크, 항공기, 각종 포 등에 관한 가장 복잡하고 대규모인 군비통제 조약 중의 하나였다. 


그 후, 1991년 7월 31일 부시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모스크바에서 미소 양측의 비축 핵무기를 30% 내지 40% 감축할 것을 명령한, 장기간 협상되던 전략무기 감축조약(START)에 섬여함으로써 미국은 소련과의 마지막 주요한 군비통제 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 군비 감축마저도 모든 다탄두 미사일을 2003년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없애기로 한 보리스 옐친 새 러시아 연방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 간의 합의로 해서 더 줄어들었다. 이 두 개의 협정으로 해서 핵탄두의 수는 3분의 2가 줄어들어 약 2만 1,000개로부터 6,000개 내지 7,000개로 될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미소 간의 핵대결 대신에 핵물길 처리와 핵확산에 대한 상존하는 염려가 주요한 과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