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 권명오
수필가 · 칼럼니스트.
Ⅰ한국 38년(63)
달빛 어린 한강
결혼을 하게 될 안신영씨 집은 청량리 전농동이고 큰집과 작은집 4촌, 6촌까지 그 인근에 살고 있는데 아버지는 일찍이9.28 수복 당시 세 들어 살고 있던 공산당원이 불러내 끌고가 총살을 해 어머니가 혼자 4남매를 키웠다. 6.25 당시 그런 비참한 비극을 겪고 애지중지 4남매를 키우고 또 시어머님까지 모셔온 장모님이라 딸의 결혼문제와 자녀들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시선에 대해 훨씬 더 신경을 썼던 분이다.
그 때문에 나는 장모님을 존경하고 안신영씨와 열심히 살려고 노력해 왔다. 하지만 충분히 은혜를 보답하지 못하고 장모님이 85세가 넘어 치매로 고생 하실 때도 미국에 살면서 전혀 도와 드리지 못한 채 돌아 가신 후 장례식을 치루고 무덤 앞에서 명복을 빈 것 밖에 없다, 재혼도 않고 외롭게 사시다 간 장모님의 외롭고 험난했던 일생을 누가 알것이며 어떻게 보답 할 수가 있을까. 아무도 대신 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 앞에 유구무언일 뿐이다.
우리집안은 안동 권씨 보수 꼴통 불교 유교이고 안신영씨 집안은 보수 기독교인데 우리보다 한층 더 보수적인지 나의 직업이 딴따라 배우라고 반대하고 불신해 장모님이 큰 고충을 겪게 됐다. 그 때문에 나는 결혼하면 배우에 대한 전 근대식 사고 방식들을 불식 시켜야 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결혼식 날자를 12월 5일로 정한 후 사랑을 아로 세기며 미래의 꿈을 펼쳤다.
그 당시는 데이트 할 장소와 환경과 조건이 너무 열악해 갈 곳이라고는 남산 아니면 극장이나 한강변이었다. 자가용도 없고 그렇다고 택시 타고 장거리 드라이브를 할 수도 없던 달 밝은 밤 한강에서 보트를 빌려 타고 강을 건너갔다. 은은한 달빛이 아름답게 강 주변을 수 놓은밤 보트를 강변 숲에 밀어 놓고 황홀한 시간을 보낸 후 배를 물위에 띄우려고 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전혀 움직이지 않아 백방으로 있는 힘을 다 했지만 도저히 불가능 해 할 수 없이 배를 버리고 언덕위 큰길로 올라가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배를 주인에게 반납하지 않고 돌아온 나는 고의는 아니지만 큰 죄를 지었다. 그날 저녁 배를 잃어 버린 주인이 얼마나 실망하고 화가 났을까. 지금 그 과거를 회상하면서 알 길 조차 없는 배 주인에게 이 글을 쓰면서 용서를 빌고 백배 사죄를 할 뿐이다.
방송 출연은 별 탈없이 이어졌지만 해마다 텔런트 모집이 계속 돼 그 수가 수백이 넘어 텔런트실에는 하루종일 출연 할 행운의 기회를 기다리는 연기자들이 늘어만 갔다. 미래에 대한 보장과 기약이 전혀 없이 뽑히는 직업 배우라는 인기 직업이 불안정 할 뿐이다. 언제 나도 뽑히지 않는 처량한 신세가 될 지 예측 할 수가 없다. 촌놈의 병적인 불안감이 밀려오는 먹구름처럼 암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