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29일 밤 9시경 한국인 관광객 33명과 헝가리인 2명을 태우고 헝가리 부다페스트 다뉴브강을 유람하던 허블레아니호가 부근에서 항해하던 크루즈선 바이킹시긴호와 충돌하면서 국회의사당 근처인 머거릿다리 아래에서 7초만에 침몰했다. 사고 후 강둑에는 시민들의 추모행렬이 이어지고,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모습, 색색의 촛불을 켜기도하고 꽃묶음을 내려놓으며 묵념을 드리는 모습들 속에서 진심어린 애도의 마음이 전해졌다. 수백명의 헝가리인과 한국 동포들이 모여 ‘아리랑’을 부르는 영상을 대하면서 울컥하니 목이 메여왔다. 2014년 ‘세월호 트라우마’가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한국인의 가슴에 또 하나의 큰 슬픔을 남겼다. 팽목항 침몰해역 앞에서 오열하는 유가족들의 지친 모습이 오버랩된다. 국가의 구조적 병폐가 우리를 슬프게 하고 있다. 대한민국 법무부의 모토가 ‘반듯한 사회, 행복한 국민’이라 하는데 세월호 진상은 언제 쯤 밝혀지려는지 삭혀지지 않는 애틋함에 몰입될 수 밖에 없는 안타까운 슬픔이다.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하는 것들’이라는 글이 떠오른다. 암송까진 아니더래도 고등 학교 2학년1학기 국어교과서에 실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것들은 그 무렵이나 지금이나 인류를 슬프게 하는 일들은 비일비재하게 여전히 우리네 인생 곁에서 이어지고 있다. 슬픈 사연을 가슴에 묻기도하고 풀어내기도 하면서 살아 간다. 재지변으로 망연자실하는 슬픔, 관계로 인한 아픔, 지독한 대물림 가난으로 배움도 병고도 사회생활 조차 힘든 이들의 삶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이러한 슬픔들을 인지하기는 쉬우나 함께 동참하는 일에는 왠지 주춤거리게 되는 인생들의 주변머리가 더욱이 우리를 슬프게한다. 잘못된 자의식의 슬픈 잔상들을 적당한 외면으로 합리화시키는 집단이기주의 까지 우리네 슬픔을 부추긴다. 탈북자의 참상,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가슴을 미어지게하는 동족상잔의 비극들이 정치적 저울대에서 가늠되고 있다는 사실은 순수한 통일에의 염원을 뛰어넘어 민족혼을 배도하는 일이요 혈맥을 매도하는 일이라서 우리민족을 슬프게 하고있다.
창세 이후로 줄곧 인생들을 슬프게하는 일들은 계속 일어나고 있다. 그리 불행해할 삶이 아닌데도 불행해 보이는 눈빛, 살아있다는게 오히려 송구스러운 조문객이 되었을 때, 예고 없이 찾아든 크고 작은 장애를 인정해야 하는 시간 앞에. 유난히 짧은 장례행렬을 만났을 때. 갑자기 부자가 된 졸부의 돈 장난질 앞에, 모종된 한겨레끼리 아픔을 나누고 어루만져 줄만한 여유는 커녕 갑질에 연연한 무리들의 눈흘김. 서로 머리가 되겠다는 추태도 우리를 슬프게 한다. 싦에 지쳐서일까. 웬만한 슬픔쯤은 삭일줄 알아서 가슴치는 통곡할 일이 아니라면 소리없는 슬픔일랑은 치마폭에 감싸며 슬며시 지나치기도 하면서 슬픔을 대하는 내성이 팽배해있는 현대인들의 감성이 소스라칠 만큼 슬프다. 슬픔에 무디어진다는 것이 뼈아픈 슬픔으로 다가온다. ‘너만 슬프냐, 나도 슬프다’ 라며 단언하는 표현이 슬픔에 대한 최악의 반응이다. 슬픔을 공감하기는 고사하고 몰염치하고 몰인정한 관성적 반응이 더 짙은 슬픔으로 다가온다. 고생 후 낙을 만났을때의 눈물, 돌아가신 아버님과 어머님 생신이 돌아올때 마다 콧등이 아릿하게 시큰거리는 아픔. 어머니 날에 가슴에 달아주는 카네이션이 풍기는 슬픈 꽃내음. 어버이 날이 돌아올때면 아우성치는 자손들의 함성의 여음에 왜그리 눈물이 나는지, 행복한 슬픔이란 이름패를 걸어주어도 좋을것 같다.
생의 크고 작은 문턱을 넘을 때마다 만나지는 슬픔이나 아픔이 결코 나쁜 것 만은 아닌 것은 세상살이 동안엔 결코 비켜갈 수만은 없는 일이란 것이다. 외면해버릴 것은 외면해 버리고 기꺼이 품다보면 어느 샌가 기쁨으로 부화되더라는 것이다. 어쩌면 슬픔을 당하는 것은 슬픔의 계곡을 벗어난 후 참 기쁨을 만나 치유받는 희열을 만나게하기 위함이 아닐까. 슬픔과 기쁨은 동전의 양면 같은 조화로움이 깃들어 있음의 징후이다. 슬픔의 터널을 지나게하는 힘은 기쁨이란 출구가 보이기 때문이요, 기쁨이 기쁨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슬픔이 어두운 터널을 견디며 빠져나왔기 때문이다. 슬픔과 기쁨은 결코 서로를 밀어낼 수 없는 차지고 질긴 연이라서 쓸모없고 실없는 악수 따위는 아니라는 것이다. 기쁨이 훈장이 아니듯 슬픔도 형벌은 아니라는 것이다. 슬픔은 서글프고 막막하지만 슬픔을 흝고 지나가는 바람 결에 달큰한 기쁨의 내음이 실려오기도 하는 것이라서. 하루들이 마냥 눈부시지 않다해서 슬픈 것도 아니지 않은가. 깊은 적막의 밤을 지나 푸른 새벽이 열리면 맑은 하루가 시작되듯 슬픔이란 어두움을 벗어나면 기쁨이란 아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에 슬픔이 잠시 고여있다해서 불행이라는 막다른 이름표를 챙길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슬픔과 기쁨의 포옹은 연연히 영원히 이어질 것이므로. 슬픔은 결코 슬픔으로 막을 내리지는 않는다. 해서 우리네 인생은 충분히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