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환
<아틀란타 한인교회 담임목사>
화장실 하수도가 막혀서 꼬챙이로 뚫어야 하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처음 배수관을 매설할 때 조금 큰 것으로 묻었으면 좋았을텐데 건물을 짓는 업자의 생각이 조금 짧았던 것 같습니다. 그 덕분에 석 달에 한 번씩 배수관을 청소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떠안게 되었습니다. 드라이버로 배수구의 나사들을 풀고, 꼬챙이를 하수구 안에 깊이 밀어 넣어 여러 번 빙빙 돌립니다. 그리고 천천히 꼬챙이를 빼내면 그 동안 수챗구멍 안에 쌓여 있던 케케묵은 엄청난 양의 머리카락 더미가 묵직하게 딸려 나옵니다. 마치, 거대한 참치를 낚는 기분입니다. 물론, 그 오물 덩어리 속에는 무심코 흘려 보낸 온갖 더러운 것들이 다 섞여 있습니다. 움푹 파인 꼬챙이의 홈에 단단하게 엉켜 붙은 오물들은 좀처럼 떨어질 줄을 모릅니다. 어쩔 수 없이 맨 손으로 일일이 하나씩 떼어 내서 쓰레기통에 버립니다. 한번 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똑같은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합니다. 토악질이 날 만큼 비위가 상하지만,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저에게 붙여진 '아버지'라는 이름이 이 모든 일을 군말 없이 천직처럼 수행하게 만듭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저는 참 비위가 약한 사람입니다. 어렸을 때는 밥을 먹을 때, 아버지가 파리를 손으로 잡거나, 급하게 도망가는 바퀴벌레를 맨손으로 때려 잡으시면 그 순간으로 식사 끝이었습니다. 음식에서 머리카락이 나오거나 채소에서 벌레가 나오면 먹었던 음식을 다 게워내서 나만 밥을 못 먹는 것이 아니라, 강철 비위를 가진 형님도 밥을 먹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닭고기나 소고기는 특유의 동물 냄새 때문에 먹는 것이 불편했고, 이상하게 생긴 것은 전혀 도전할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모질이'가 아버지가 되고 나니까 언짢거나 거슬리는 것이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주는 대로 다 먹고, 더러운 것을 치우는 일도 아주 쉬워졌습니다. 꼬챙이에 감겨 있는 오물덩어리들을 꼼꼼히 하나씩 떼어서 쓰레기통에 버립니다. 옆에서 잔뜩 얼굴을 찡그리고 그 모습 지켜보던 아들 놈이 한마디 합니다. “아흐, 더러워!” 어쩌면 그리도 못난 지애비를 그대로 빼어 닮았는지! 제가 한마디 합니다. “뭐가 더러워. 전부 다 네 몸에서 나온 것인데!” 그러자 아들이 진저리를 치며 방으로 도망칩니다. 갑자기 아버지 생각이 나서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생각해보니, 제가 지금 하고 있는 말이나 몸짓은 예전에 저의 아버지가 다 하셨던 것들입니다. “뭐가 더러워, 다 너 한테서 나온 것들인데!” 아버지가 하셨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다 그립고 소중합니다. 꼬챙이에 붙은 오물들을 손으로 일일이 떼어내면서 아버지의 말씀을 곱씹어 봅니다. 그것들이 모두 내 안에서 나온 것들이랍니다. 더러운 가래, 때, 머리카락, 손, 발톱 그리고 귀찮아서 함께 하수 구멍으로 흘려 보낸 잘잘한 쓰레기들이 하나도 여과되지 않고 고스란히 제 눈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내게서 나온 것들이 결국에는 하수구 배수관을 막아버렸구나!” 갑자기 내 인생을 막아버리고 망가뜨리는 것도 내 안에서 나온 것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욕심, 미움, 시기, 질투, 거짓말, 음란한 마음, 허영심, 이기심... 이루 말할 수 없는 많은 내 안의 쓰레기들이 내 인생을 가로막고, 내 영혼의 숨통을 옥죄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수관을 막은 오물들은 더러워 하면서도 내 영혼에 쌓인 쓰레기들에 대해서는 너무도 지나치게 관대하지는 않았는지 깊은 반성을 하게 됩니다. 애틀랜타의 여름이 그 어느 지역의 것보다 유독 푸르고 싱그러운 것은 인간이 만든 인위적인 쓰레기들이 유독 적기 때문일 것입니다. 건강한 대 자연 속에서 마음의 앙금과 쓰레기들을 비우는 여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