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공직생활은 의회에서 지낸 겸손한 의원 제럴드 포드는 스피로 T. 애그뉴 부통영이 임기 이전과 임기중에 수회한 사실이 밝혀져 부통령직을 사임한 후, 닉슨의 부통령이 되었다. 그의 최우선 과제는 닉슨 해임을 목표로 한 탄핵절차로 해서 흔들린 정부에 대한 신임을 회복시키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포드 대통령이 많은 신임을 받았지만, 그가 닉슨을 사면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미래의 소추를 받지 않도록 해주었을 때에 그에 대한 신임도는 급속히 떨어졌다.
공공정책에서, 포드 대통령은 닉슨이 정한 진로를 따랐다. 인플레와 실업이 계속 증대되고, 국민총생산(GNP)이 감소되었기 때문에 경제문제는 여전히 심각했다. 포드 대통령은 처음에, 1929년에 허버트 후버 대통령이 그랬듯이, 국민을 구슬리려고 노력했다. 그것이 실패했을 때, 그는 인플레 억제책을 단행했는데, 이것으로 해서 실업율은 12%가 되었으며, 세계 실업수당과 감세조치로 해서 원기는 약간 회복되었지만, 경제적 곤경은 끝나지 않았다.
카터 시대
민주당 출신 조지아 주지사였던 지미 카터가 1976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선거운동 기간 중에 워싱턴 정치에는 문외한임을 자처하던 그는 신선한 통치방식을 약속했지만, 전국적 수준에 있어서의 그의 경험부족으로 해서 그의 재직 기간 중의 일들은 시작부터 복잡해졌다. 해군장교 및 기사의 훈련을 받은 그는 난국을 뚫고 나아갈 수 있는 보다 강력한 지도자를 미국민들이 원하고 있었을 때에, 기술자 출신 관료로 흔히 보였다.
경제문제에서 카터 대통령은 처음에 적자지출 정책을 허용했다. 통화정책 수립 책임을 지고 있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적자를 메우기 위해 통화양을 증가시키자 인플레율은 10%로 올라갔다.
카터 대통령은 인플레를 둔화시키기 위해 예산 감축으로써 대응했지만, 이 감축은 민주당 정책의 핵심인 사회보장 계획들에 영향을 주었다. 그의 임기가 끝날 무렵, 적자는 여전히 많았으며 업계의 기능이상 현상은 분권가격 하락과 금리에서 볼 수 있었다.
카터 대통령은 또한 그가 실효성있는 에너지 정책을 개발하지 못했다는 비판에 마주쳤다. 그는 "정신적 전쟁에 상당하는 것"이라고 그가 부른, 외국산 석유에 대한 의존도를 줄일 것을 목표로 한 포괄적인 계획을 제시했다. 반대자들은 의회에서 그 계획을 좌절시켰다. 카터 대통령은 인민주의자(인민 전체의 이익 증진을 목표로 하고 있는 정치철학의 신봉자)로 자처했지만, 그의 정치적인 우선순위 과제들은 결코 명백하지 않았다. 그는 정부의 보호역할을 찬성했지만, 그 다음에는 규제해제, 즉 경제생활에 있어서의 정부통제의 철폐 과정을 시작했다. 그는 지난 세기에 있었던 몇몇 제한조치들이 경쟁에 제한을 가하고, 소비자의 지출을 증대시켰다고 주장하면서 유류, 항공기, 철도, 화물트럭 등 산업에 있어서의 규제해제를 찬성했다.
카터 대통령은 민주당 영도력을 재확립하기를 희망했지만, 국민의 지지나 의회 측 지지를 얻으려는 그의 노력은 실패했다. 그의 임기가 끝날 무렵, 그를 찬성하지 않는 율은 77%에 달했으며, 미국민들은 또다시 공화당에 기대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