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  ) 권명오

수필가·칼럼니스트

                                                                                                  

제  1 부.  한국  38  년(27)    

                                                    

구두닦이들과  꿀꿀이죽 생활


이른 새벽 금촌으로 가서 물건을 팔고 돌아오면 전날밤 일들이 꿈만 같고 지옥을 헤멘 것만 같았다. 그때 겪은 일들과 경험들을 잊을 수가 없고 훗날 그것이 삶의 인내심과 도전과 위기를 극복 할 수 있는 큰 자산이 됐다.  

날이 갈수록 양키물건 장사도 경쟁이 심해지고 물건을 구하기가 힘들어 졌다. UN 군 부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어떻게 하든 UN군 부대에서 일을 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하늘에 별 따기다. 아버지는 적성면 피난민 수용소가 있는 무건리 인근 양주군 효천면 해내미 마을에 집을 구해놓고 이사를 했다. 그리고 적성면과 효천면에서 식량 배급을 받고 또 형과 아버지는 농사 품을 팔았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양키물건을 구할 수가 없고 또 오음리와 금촌 중간 지점에서 잠을 자고 갈 수 있는 집도 없어져 장사를 그만 두었다.

아버지는 무건리에다 임시 오막사리 집을 지어놓고 나를 그 집에서 살게하고 다섯 식구의 식량을 배급 받게 했다. 솔직히 부정이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고향 가월리와 임진강 넘어  38선 인근에서는 UN군과 중공군이 한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한 전투를 계속하고 있다.  전쟁은 언제 끝나게 될지 알길이 없다. 임진강변  38 선 인근에서 산 것이 원망 스럽다. 전쟁은 어리석은 인간들이 만든 비참한 인재다. 70이 넘은 사람들은 거의 다  6.25 남침으로 인한 피해자들이다.  나도 6.25 남침으로 인해 생사의 고비를 수 없이 넘나들면서 때로는 보리겨로 죽을 끓여 먹고 나무장사 날품팔이를 하고 피난 보따리를 지고 각 곳을 옮겨 다니고 한강을 건너 가기 위해 밤마다 강가에서 추위에 떨며 밤을 새우고 양키물건 장사를 하면서 눈 덮인 밤 산길을 오가고 또 다시 무건리에서 나무 지게를 지고 험하고 먼 산길을 돌아 신산리로 가 팔아야 했던 고충과 푸대접과 피눈물 나는 과거사가 눈앞을 아른 거린다.  

이 글을 쓰면서 무사히 살아온 지난 83 년이 너무나 감사하다.  전쟁은 언제 끝날지 예측 할 수도 기약 할 수도 없고 나무 장사를 계속 할수도 없다.  그렇다고 형처럼 농사 품팔이를 할 실력도 관심도 없다. 아버지는 그런 내 심정을 아시는지 말이 없다.  나도 무엇인가 살길을 찾아야 할텐데 길이 보이지 않아 집을 나와 무작정 미군부대 주변을 헤맸다.  집으로 돌아 가는것도 싫어 구두닦이 하는 아이들과 노숙을 하면서 지내게 됐다. 그래도 꼴난 자존심 때문에 구두 닦는 일은 못하고 그들이 벌어온 돈이나 구해온 빵과 꿀꿀이죽 ( 미군 식당에서 버린 음식)을 얻어 먹고 사는 한심한 생활을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허망한 오색 꿈을 꾸는 한심한 거지생활을 하고 있는 나를 우연히 외삼촌이 발견하고 아버지 어머니를 찾아가 명오가 신산리 미군부대 주변에서 구두닦는 아이들과 함께 거렁뱅이 노릇을 하고 있다면서 야단을 해 집안이 난리가 났고 아버지가 급히 찾아와 집으로 가자고 했다.  할 말이 없었으나 그대로 돌아 갈 수가 없었다.  무엇인가 살길을 만든 다음 집으로 돌아 가겠다는 결심 때문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