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10월 주식시세는 폭락했으며, 보통주의 액면 가격의 40%가 날아갔다. 그러나 주식시세가 폭락한 후에도 정치가들과 산업 지도자들은 이 나라의 경제에 대하여 계속 낙관적인 예언을 했다. 하지만 공황은 깊어졌고, 신뢰도 사라졌으며, 많은 사람들이 평생 모아둔 저축을 잃었다. 1933년에 뉴욕 증권거래소의 주식 가격은 1929년 당시의 최고 가격의 5분의 1도 안 되는 가격이었다. 상점들은 문을 닫았으며, 공장들은 폐쇄되고 은행들은 파산했다. 농가소득은 약 50%나 줄어들었다. 1932년에 미국민 약 4명 중 1명은 실업자였다. 


문제의 핵심은 이 나라의 생산능력과 국민들의 소비능력의 불균형이었다. 대전 중과 대전 후의 생산 기술의 대혁신으로 산업의 생산고는 미국 농민들과 임금 근로자들의 구매력 이상으로 증가되었다. 건전한 투자 가능성을 훨씬 넘어서 증가되고 있던 부유층 및 중류층의 저축 자금은 주식이나 부동산의 광적인 투기의 자금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증권시장의 붕괴는 몇 가지 폭발 현상 중의 하나에 불과했었데, 그 속에서 투기의 취약한 구조는 무너져버렸던 것이다. 


1932년의 대통령 선거는 주로 세계 대공황의 원인과 가능한 구제책에 관한 논쟁이었다. 불운하게도 증권시장이 붕괴되기 8개월 전에 백악관으로 들어가게 되었던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산업의 수레바퀴를 다시 가동시키기 위해 지칠 줄 모르게 노력했었다. 위기가 증대되고 있는 동안에 뉴욕 주지사로서 이미 평판이 좋았던 그의 민주당 정적 프랭클린 D. 루즈벨트는 대공황이 미국경제의 기저에 있는 결함들로 해서 생겼으며, 이 결함들을 1920년대의 공화당 정책들이 악화시켰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후버 대통령은 미국경제는 근본적으로 건전하지만, 전 세계적인 불경기의 영향을 받아 흔들렸던 것이며, 세계적인 불경기의 원인은 대전때문이라고 응답했다. 이러한 논쟁의 배후에는 하나의 명백한 함축적인 의미가 있었다. 즉, 루즈벨트는 과감한 실험적인 구제책들을 위해서 연방정부의 권한을 사용할 각오가 되어 있었지만, 후버 대통령은 주로 자연스러운 경제회복 과정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선거의 결과는 후버가 얻은 1,570만 표에 대하여 22,80만 표를 얻은 루즈벨트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미국은 바야흐로 새로운 경제적 및 정치적 변화의 시대로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