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조약이 "협상에 의한 강화"의 성질을 갖게 되는 것이 월슨 대통령의 희망이었지만, 그는 전쟁이 불러일으킨 격정으로 해서 연합국들이 가혹한 요구를 하게 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했다. 이 점에서 그는 옳았다. 민족자결의 개념은 실행 불가능한 것임이 입증되었다. 평화를 위한 자기의 최대 희망인 국제연맹이 연합국들에게 자기가 여러 가지 양보를 하지 않는 한 결코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윌슨 대통령은 파리의 강화협상 기간 중에 민족자결 문제, 그리고 이 밖의 특정 사항들에 관해서 양보했다. 그러나, 그는 라인란트 전역을 독일로부터 떼어내자는 조르즈 클레망소 프랑스 수상의 요구에 저항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가 자아르 분지를 병합하지 못하도록 막았으며, 베르사이유 강화조약이 독일에게 전쟁 배상의 무거운 부담을 안겨주기는 했지만, 전쟁 비용 전액을 독일에게 배상시키자는 제안은 좌절시켰다.
결국에 가서, 관대하고 지속적인 평화를 위한 윌슨 대통령의 제안들은 국제연맹을 제외하고는 남은 것이 없었으며, 윌슨 대통령은 자기 자신의 나라까지도 국제연맹 가입을 일축하는 마지막 아이러니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었었다. 당시 윌슨 대통령은 판단을 정확하게 하지 못한 것이 일부 원인이 되어 강화안원단 편성에서 야당인 공화당의 한 주요 인사를 파리에 데리고 가지 않은 정치적 실수를 했다. 그가 미국의 국제연맹가입을 호소하려고 귀국했을 때에도 그는 공화당이 우세했던 상원에서 비준을 얻기 위해 필요한 대수롭지 않은 양보마저도 거부했다.
워싱턴에서 패배한 윌슨 대통령은 미국 전역을 여행하면서 자기의 주장을 미국민들에게 호소하였다. 고된 강화협상과 전시 대통령 직무 수행의 중압으로 해서 몸이 쇠약해진 그는 1919년 9월 25일 콜로라도주 푸에블로에서 뇌졸중을 일으켜 반신불수가 되었으며, 끝내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다. 1920년 3월 상원은 그 최종 표결에서 베르사이유 조약과 국제연맹 규약을 모두 거부했다. 그 결과로, 미국이나 러시아가 참가하지 않은 국제연맹은 허약한 기구로 남아 있게 됐다.
전쟁과 평화를 위한 도덕적 및 법적 근거에 대한 윌슨 대통령의 신념은 미국민들을 격려해왔었다. 그러나, 사건들이 이러한 낙관적인 기준에 따라 전개되지 않았을 때 윌슨 식 이상주의는 마침내 환멸을 자아냈으며, 미국은 고립주의로 빠져 들어갔다.
전후의 사회적 불안
대전에서 평화로 접어드는 이행기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소란스러운 시기였다. 1917년 봄에 유럽 전역에서 급속히 만연되던 유행성 독감이 1918년 봄에 미국에서 창궐했다. 그 독감의 발생과 마찬가지로 그 독감은 1년 후에 원인 불명으로 사라지기에 앞서, 50만 명을 웃도는 미국인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대전 직후의 벼락 경기는 높은 기대를 갖게 했지만, 그 기대는 전후 경제가 정상상태로 되돌아가게 되자, 재빨리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근로자들은 앙등일로의 생계비, 장시간의 근로시간, 동정심 없는 경영 등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1919년 한 해만 해도 400여만 명의 근로자들이 파업을 했다. 뿐만 아니라, 그 해 여름에 인종 폭동은 미국 남북부에서 모두 발생했다.
그러나 최대의 전국적인 반대와 염려를 도발한 사건이 2년 전에 미국 바깥에서 발생했었다. 즉, 1917년 러시아에서 발생한 볼셰비키 혁명이다. 사기가 낮은 미국민들은 러시아에서 한 작은 도당이 정권을 장악했듯이, 한 도당이 미국을 장악하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게 되었다. 1919년 4월 미국의 체신 공무원들이 저명한 미국민들 앞으로 송부되는 약 40개의 폭탄들을 도중에서 가로챘을 때에 이러한 두려움은 구체적인 현실로 나타났다.
미첼 파머 법무장관은 법무성 내에 방첩을 담당하는 한 국을 신설하고, 에드거 후버를 그 국장으로 임명했다. 후버 국장은 유명한 극렬분자들에 관한 자료들을 수집하기 시작하고 갖가지 단체들을 급습한 결과, 많은 사람들이 국외추방을 당하게 되었다. 파머 법무장관의 무서운 경고로 해서 이른바 "적색 위협"은 계속 증폭되었지만, 이러한 위협은 실제로 현실화되어 나타나지는 않았으며, 1920년 여름에 이르러 미국민들은 미국이 무정부 상태가 될 위험성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