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 ) 권명오
수필가·칼럼니스트
Ⅰ한국 38년(19)
잿더미가 된 집과 1.4 후퇴
며칠간 군인들이 대대적인 초호화 명절 잔치 준비를 끝내고 12월 31일 밤 깊이 잠든 1월1일 0시 중공군의 총공격을 당한 국군은 제대로 총 한번 못 쏘고 줄행랑을 쳤다. 중공군 대병력의 진격과 UN군 전투기들의 폭격으로 기월리 일대는 완전히 불바다가 됐고 어머니와 외삼촌은 그 와중에도 음식을 싸 가지고 산길을 돌고 돌아 오음리로 왔다. 허무하게 패하고 만 국군들이 한심 했지만 어쩔수 없고 피난처인 오음리도 중공군들이 밀려 올 위기 상황이다.
저녘무렵 아버지는 급히 형과 사촌형과 마을 청년 두 사람을 불러 놓고 돈을 나눠주며 젊은 사람부터 먼저 피난을 가라고 했다. 중공군도 노인과 어린이들과 부녀자들은 죽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나도 따라가고 싶었으나 아무 말도 못했다. 형들 일행을 다시 만나지 못할 것만 같고 영원한 이별이 될것 같다. 다음날 중공군들이 새까맣게 밀려 들어왔다. 더이상 어쩔수가 없어 어머니와 외삼촌은 죽으나 사나 고향으로 가겠다며 먼저 떠났다.
세상이 완전히 중공군 천하로 변했다. 그런데 다행히 죽창으로 찔러 죽이지도 않고 부녀자들을 겁탈하지 않았지만 무섭고 겁이나 가슴을 조리고 눈치를 살폈다. 다음날 저녁 무슨 일이 발생 했는지 남자 어른들을 연행해 갔다. 아버지도 끌려가 밤 늦게 돌아왔다. 중공군은 고향이 가월리인데 왜 이곳에 와 있느냐며 돌아 가라고 했다며 아침 일찍 아버지와 나는 피난짐을 지고 고향을 향하는데 하늘과 산과 들은 무심한 채 말이 없고 한가롭게 떠있는 구름사이 정찰기가 맴돌고 중공군들은 산속 땅 속에 죽은 듯이 숨어있다. 그날이 1,4 후퇴 날이다.
UN 군 비행기는 중공군을 찾느라 하늘을 누비고 우리는 그런 전쟁의 현장을 걸어가며 미군 정찰기 조종사가 우리가 죄없는 민간인 이라는 사실을 현명하게 판별해 주기를 바라면서 걸어간다. 적들은 상황에 따라 민간인으로 변장 할수도 있기 때문에 정찰기는 오판 할 수가 있다. 그 때문에 우리에겐 죽음을 면할수 없는 생사의 갈림 길이다. 어쟀든 정찰기는 가월리에 도착할 때까지 감시를 하고 보호해 주었다. 현명한 조종사에게 감사할 뿐이다.
마을은 완전히 잿더미가 됐다. 다행히 땅속에 묻어둔 양식과 무쇠 밥솥과 식기 등이 사용할 수 있고 과일 나무도 그대로 있다. 방공호를 파고 나무를 잘라 그 위에 깔고 흙을 두껍게 덮으면 포탄에도 안전한 안식처가 될 수 있고 땅속은 온도 차가 없어 사는데 큰 지장이 없다. 마을 사람 중 고양군 벽제까지 피난 갔다가 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해 되돌아 온 사람이 함께 피난을 가던 큰아버지가 손자를 업고 가다 포탄을 맞아 즉사했고 손자는 무사하다는 비보를 전했다.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는 슬픔을 참고 돌아가신 큰아버지 시체를 찾아야 훗날 다시 이장을 할 수 있다면서 곡갱이와 삽을 가지고 어두운 밤 그것도 중공군들의 천하가 돤 전쟁터를 향해 험하고 먼 60리 길을 떠났다. 무모하기 이를 데가 없었으나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무사히 다녀 오기를 기원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앞을 가린다. 피는 물보다 진한 때문인지 어둠속으로 떠나는 형제는 너무나 용감하고 당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