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 ) 권명오.
수필가·칼럼니스트.
Ⅰ. 한국 38년(18)
배신과 피난
국군과 UN군이 평양을 점령하고 북진할 때 적성면 경찰지서 소속 청년단에서 아버지를 데리고 갔다. 이틀 후에 돌아오신 아버지는 구타와 고문울 당했는데 이유는 아버지가 공산당원하고 가까웠고 또 총살 당한 내무서원 갑칠이를 밥을 먹였다고 누가 밀고를 했는데 그것을 문제 삼아 인민군과 내통하고 있다며 고문을 했다.
아버지는 너무나 억울했고 세상 인심이 저주 스러웠다. 무엇보다 책임자가 아버지와 친분이 두터웠던 사람이다. 서울에 살고 있는 적성 농장 사장 밑에서 일하며 연락책을 맡았던 사냥을 잘하는 포수였던 K 씨다. 그는 해뱅 후 가월리 여성과 결혼한 후 정착한 사람인데 결혼전 서울에서 출장 오면 우리집에 여장을 풀고 동네 사람들을 불러 술 타령을 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청년 단장이 돼 사람들을 시켜 아버지를 고문시키고 자기는 모르는척 했다. 아버지는 그의 배신이 뼈에 사무쳤고 나도 그를 증오 했다가 용서했다.
그 사람은 시골 사람들을 이용하고 이득을 취하고 살다가 인심을 잃고 말았다. UN 군이 압록강 까지 진격해 곧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믿고 있던 우리에게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와 전투가 치열해졌고 또 중공군의 인해전술 때문에 UN군이 고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그래도 우리는 국군과 UN군의 전투력과 공군과 해군의 강력한 화력을 믿고 안심을 했는데 12월 20일 국군들이 마을로 들어와 짐을 싸 가지고 피난을 가라고 해 기가 막혔고 어쩔수 없이 짐을 싸들고 피난길에 올랐다.
중공군이 인정 사정 없이 죽창으로 사람들을 마구 찔러 죽이고 부녀자들을 강제로 끌고 간다고 해 군인들에게 물어 보니 걱정 말라고 하면서 임진강 일대에서 중공군들을 싹쓸이 해 버릴 것이니 잠시 피난 가 있다가 돌어오면 된다며 그 동안 먹을 양식만 가지고 가라고 했다. 천연면 법원리를 지나 광탄면으로 피난을 가는데 그 일대가 군인들 천하로 변했다. 전시는 군인들 세상이다. 그들이 법이요 집행관이다. 군인들을 통제 할수 있는사람은 그들의 상관들 뿐이다. 전시에는 천륜도 인륜도 무용지물이다. 군인들이 총살을 해도 약탈을 해도 부녀자들을 증발해도 어쩔 수가 없다. 젊은 여성들을 밥을 해주고 가라고 데리고 가면 함흥차사다. 나는 그런 현장을 수 없이 보고 겪었다.
우리는 일단 광탄면 오음리에 피난처를 정했다. 그곳은 첩첩 산중 안에 있는 마을인데 8촌 매형의 고향이라 쉽게 방을 구해 거처를 정하게 됐다. 며칠후 양식이 떨어져 아버지, 어머니와 외삼촌은 양식을 가지러 가월리로 갔다가 아버지만 양식을 가지고 왔다. 어머니와 외삼촌은 군인들이 도와 달라고 해 마을 아주머니들과 함께 군인들의 밥을 해 주고 떡과 술도 만들었다. 군인들은 추수해 놓은 양식을 마음대로 먹고 또 가축들도 닥치는데로 잡아 먹었다. 그리고 임진강 변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대포와 기관총을 배치하고 전투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불행하게도 1월 1일 명절을 위한 잔치 준비 였다. 군인들은 떡과 두부, 부침개와 소, 돼지, 닭 까지 잡아놓고 잔치 준비 하느라 적의 동태 조차 파악치 못한 채 잠자리에 들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