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환(아틀란타 한인교회 담임목사>
어느 교회의 성도 한 분이 주일 날 예배에 참석했다가 경험했던 이야기입니다. 그날, 담임 목사님이 '나눔의 기쁨'에 대해서 설교를 하신 후, 예배에 참석한 교인들에게 그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좋으니 옆에 있는 사람과 나누도록 부탁을 했습니다. 이 성도는 몹시 당황했습니다. 왜냐하면, 달랑 헌금만 가지고 예배에 참석했기 때문입니다. 호주머니란 호주머니는 다 찾아보았지만, 옆 사람과 나눌 수 있을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순간 참 곤혹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자기 옆에 앉아 계신 할아버지는 벌써부터 뭔가를 나누려고 손에 작은 것을 쥐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순간 재빨리 머리속에서 주판알이 튕겨지기 시작했습니다. “목에 건 넥타이를 풀어서 줄까?”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이제 서너 번 밖에 사용하지 않은 거의 새 것입니다. 새로 사려면 적어도 100불 이상 줘야합니다. “그럼, 손에 낀 작은 금반지를 드릴까?” 몇 년 전만 같으면 그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금값이 장난이 아니게 올랐습니다. “구두를 벗어 드릴까?” 할아버지와 발 크기가 비슷해 보여서 “그냥 선심을 쓸까” 마음을 먹었지만, 그것도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이 구두는 딸이 얼마 전 생일날 선물로 사준 뜻 깊은 것입니다.
갑자기 목사님이 원망스러워졌습니다. 설교만 하면 됐지, 그런 쓸데없는 짓을 시켜서 성도들을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미리 한 주 전에 광고를 해 주었으면 훨씬 더 부드러운 분위기가 연출될 수 있었을 텐데, 정말 짜증이 나고, 속이 많이 상했습니다. “오! 주님 도와주세요. 이 고비를 넘길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교회에서 아주 오랜 만에 진실한 기도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큰 일 났다!”는 생각으로 몸을 뒤로 젖히는 순간 바지 뒷주머니 속에서 뭔가가 찌르는 느낌이 전해져 왔습니다. 주님이 기도에 응답하신 것입니다. 어제 점심 식사 때 회사 동료들과 설렁탕을 먹고 나오다가 계산대에 있는 그릇에서 박하사탕 하나를 집어 무의식중에 뒷주머니에 넣었는데 그것을 다시 찾은 것입니다. 옆에 앉으신 할아버지에게 너무너무 잘 어울리는 완벽한 선물이었습니다. 훈훈한 나눔의 실천이라고 생각하면서 할아버지에게 자신 있게 손을 뻗어 박하사탕을 드렸습니다. 순간, 할아버지도 동시에 손바닥을 펼치셨는데 거기에는 어느 유명회사의 '우황청심환'이 놓여 있었습니다.
투명 플라스틱 용기 속에 담겨 있는 우황청심환은 언뜻 보기에도 금도금을 한 아주 귀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심장질환이 있어서 항상 비상약으로 가지고 다니는 것일세. 우리를 위해 자신의 심장을 내어 주신 주님의 사랑과 잘 부합되는 것 같아서 자네에게 주고 싶네.” 할아버지의 말씀을 듣는 순간,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서 문을 꽉 닫고 영원히 나오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 할아버지가 “무엇을 나누면 ‘좋은 나눔’이 될 수 있을까?” 계속해서 심사숙고하고 계시던 그 순간에 이 성도는 자기가 '나눌 수 없는 이유' 만을 찾느라고 분주했던 것입니다. “주님! 저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조용한 자책의 소리가 입술에서 묵직하게 빠져 나왔습니다. 우리는 항상 “주님의 이름으로 나눈다”는 말을 전매특허처럼 자주 사용하면서도, 나눔에 인색해 왔습니다. 우리들에게 있는 하찮은 것들을 나눔으로써 우리의 사명을 다 했다는 착각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정말 소중한 것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직무 유기를 거듭해 왔습니다. 사랑해야 할 순간에는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찾고, 용서해야 할 순간에는 용서할 수 없는 이유를 댑니다. 남의 실수들에 대해 관대하게 넘어가야 할 순간에는 넘어가서는 안 되는 이유를 말하고, 자신은 이해 받기를 원하면서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유들을 조목조목 찾아냅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당신의 가장 소중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진정한 나눔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의 나눔이 더 깊어지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