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미국 농민들은 괄목할 만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되풀이하여 일어나는 고난의 시기를 겪었다. 이에는 지방의 쇠진, 자연의 변덕, 자급자족제의 감소, 그리고 충분한 법적 보호와 원조의 부족과 같은 몇 가지 요인들이 있었다.
하지만,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과잉생산이었다. 철도가 부설되고 대평원의 인디언들이 점차적으로 보호 지구로 옮겨감으로써 서부지역에의 정착을 위한 새로운 터전이 열린 가운데, 1 헥타르당 농작물 산출량을 크게 증가시킨 농기계의 개량과 더불어 경작농토 면적은 19세기 후반 전체에 걸쳐 급속히 늘어났다. 캐나다, 아르헨티나 및 오스트레일리아와 같은 나라들에서도 일어난 미국과 유사한 농토의 팽창은, 이제는 미국의 농산물의 많은 부분이 팔리던 국제시장에서 문제들을 더욱 심화시켰다.
정착민들이 서부로 더 멀리 진출하면 할수록, 그들은 산품을 수송하기 위해 철도에 더 많이 의존하게 되었다. 동시에 서부지역의 공업 분야 대기업체들의 뒷받침을 받은 의회가 오랫동안 지지해 온 보호관세가 부과되는 결과로, 농민들은 공산품에 비싼 값을 치렀다.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중서부 지역과 서부 지역의 농민들은 그들의 저당물을 잡은 은행에 더 많이 빚지게 되었다.
남부에서는 남부동맹의 몰락으로 농업 분야의 관행이 크게 변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변화가 소작제도인데, 소작인들은 종자와 필수적인 영농 보급품을 제공받는 대신 수확고의 절반 정도까지를 지주가 차지했다. 남부의 흑인 농부의 80퍼센트, 그리고 백인 농부의 40퍼센트로 추정되는 농민들이 남북전쟁 이후, 그들을 궁핍하게 만드는 이같은 제도 아래서 살았다.
대부분의 소작인들은 빚더미에서 헤어나지 못했는데, 이 곤경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희망은 농사를 더 많이 짓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 목화와 담배가 과잉 생산되었고, 따라서 가격이 하락하고 지방이 가일층 쇠퇴했다.
전반적인 농사 문제를 다루기 위한 첫 노력은 '농민공제조합(Grange)'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1867년 농무부 직원들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조합원들은 처음에는 대부분의 농민 가정들이 당면했던 사회로부터의 소외 에 대처하는 사회활동에 주력했다. 여성들의 참여가 적극적으로 장려되었다. 1873년의 공황에 자극받아 농민공제조합의 지부는 곧 2만개로 확대되었고, 조합원 수도 150만명으로 늘어났다.
이들 공제조합의 대부분이 궁극적으로는 실패했지만, 그들은 그들 자신의 판매망, 상점, 가공 공장, 생산 공장 및 협동 조직을 설치했다. 이 운동은 또한 1870년대에 어느 정도의 정치적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몇몇 주에서는 "농민공제조합 원법"을 제정하여 철도 요금과 창고 사용료를 제한하기도 하였다.
1880년에 이르러서 이 공제조합 운동은 쇠퇴하기 시작했고, 대신 "농민동맹(Farmers' Alliance)" 운동이 일어났다. 1890년에 이르러서는, 이 동맹은 뉴욕州에서 캘리포니아州까지 전국에 걸쳐 약 150만명의 회원을 갖게 되었다. 이 농민동맹과 나란히 활동을 벌인, 아프리카系 미국인들의 조직인 "유색농민 전국연합(Colored Farmers National Alliance)"의 회원은 100만명이 넘었다.
시초부터 농민동맹은 정성들여 수립한 경제 계획을 가진 정치적 조직이었다. 이 동맹의 초기의 한 강령에 따르면, 이 동맹의 목적은 "계급 차별적인 입법과 집중된 자본의 침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농민들을 단결시키는 데에"있었다. 그들의 계획은 철도 사업을 (완전한 국유화가 아닐지라도) 규제하고, 빈민구제를 위해 통화를 증발하고 , 관세를 인하하며, 정부가 소유하는 창고 및 저금리 대여시설을 설치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