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환 <아틀란타 한인교회 담임목사>
어느 날 동방 교회 영성의 대부라고 불리는 '마카리우스”(Macarius the Great)'에게 제자 중의 한 사람이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주님을 따르려면 죽어야 한다는데, 도대체 죽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마카리우스는 그 제자에게 “지금 당장 공동묘지로 가서 거기에 묻힌 사람들에게 심한 욕을 하고 오라”고 시켰습니다. 제자가 그대로 하고 돌아 왔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시 가서 그들을 칭찬하고 오라고 말했습니다. 제자는 다시 묘지로 가서 스승의 말대로 하고 돌아왔습니다. 마카리우스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들에게 욕을 할 때와 칭찬을 할 때 그들이 달리 반응하더냐?” 제자가 머리 도리질을 하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욕을 할 때나 칭찬을 할 때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마카리우스가 말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죽은 것이다.”
깊이 되새겨 볼 이야기입니다. 요즘, 교회가 시끄럽습니다. 한국도 그렇고 미국도 그렇고 교회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각이 따갑습니다. 죽어야 하는데 죽지 못하고, 버려야 하는데 버리지 못해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허접쓰레기로 여기셨던 것들과 사도 바울이 배설물로 버렸던 것들이 오늘 날의 교회 안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들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대 반전입니다. 학연, 지연, 혈연 같은 별의 별 잡동사니들이 교회 안에 차고 넘쳐서 '신앙의 본질'을 흐려 놓고 있습니다. 웬 명문학교 동문들이 그리도 많은지! 교회 안에서 따로 모이고, 교회 밖에서도 따로 모이고, 시간을 내서 끼리끼리 살아갑니다. 그 조직에 소속되지 못한 사람들은 좌절감 속에서 학위를 위조하고, 태어나고 자란 고향을 속이고, 심지어는 멀쩡한 나이까지 줄였다 늘였다 하면서 고무줄로 만들어버립니다.
예전에 다른 주에서 열린 큰 대회에 참여 했다가 동료 목사님들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인사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한 목사님이 자기와 같은 그룹에 속한 친구 목사를 띄워 주고 싶었나 봅니다. “김 목사님, 여기 계신 이 목사님은 정말 훌륭한 분입니다. 한국에서 제일 좋은 법대를 나왔습니다!” 그러자, 그의 훈수에 답례라도 하듯이, “어허, 이 친구, 자네는 같은 대학 상대를 나오지 않았나!” 서로 흐뭇하게 웃으면서 맞장구를 쳐줍니다. 짜증나게 아름다운 우정입니다. 주변에 학벌도 짧고, 영어도 안되고, 목회도 뜻대로 되지 않아서 고생하는 목사들이 많이 있는데 꼭 그 잘난 짓을 해야만 하는지 억하심정(抑何心情)이 생겼습니다. “저는 뱃놈대학 그물질과를 나왔습니다!” 유머인 줄 알고 모두가 웃었지만, 입맛이 더럽게 썼습니다.
법대를 나왔으면 법조계로 가는 곳이 옳고, 상대를 나왔으면 상업 계통의 일에 종사하는 것이 정답입니다. 교계로 들어왔으면 세속의 일을 다 버리고 신학교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정석입니다. 세상의 학력이 교회 안에서도 화려한 이력이 되고 성공의 잣대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저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자칫하면 '열등의식'이라고 비아냥거릴까 바, 그냥 쓴웃음으로 그 자리를 피하고 말았습니다. 교회 안에서 목회를 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소리가 학벌 이야기, 재산 이야기, 사회적 명성과 성공신화 이야기입니다. 예수 이야기는 없습니다. 죽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죽지 않아서 자꾸 자기를 드러내고 자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누가 욕하면 발끈하고, 칭찬하면 우쭐해 하는 것입니다. 그 잘난 바울사도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는 말을 입에 달고 산 이유를 다시 한번 묵상해 보아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