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4세기경, 그리이스의 "피시아스"라는 젊은이가 교수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효자였던 그는 집에 돌아가 연로하신 부모님께 마지막 인사를 하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하지만 왕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길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피시아스"에게 작별 인사를 허락할 경우, 다른 사형수들에게도 공평하게 대해줘야 합니다. 그리고, 만일 다른 사형수들도 부모님과 작별인사를 하겠다며 집에 다녀오겠다고 했다가, 멀리 도망간다면 국법과 질서가 흔들릴 수도 있었습니다.
왕이 고심하고 있을 때, "피시아스의 친구, 다몬"이 보증을 서겠다면서 나섰습니다. "폐하, 제가 그의 귀환을 보증합니다. 그를 보내주십시오." / "다몬아, 만일 피시아스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찌하겠느냐?" / "어쩔 수 없죠, 그렇다면 친구를 잘못 사귄 죄로 제가 대신 교수형을 받겠습니다." / "너는 피스아스를 믿느냐?" / "폐하, 그는 제 친구입니다." 왕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습니다. "피시아스는 돌아오면 죽을 운명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돌아올 것 같은가? 만약 돌아오려 해도 그의 부모가 보내주지 않겠지. 너는 지금 만용을 부리고 있다." / "저는 피시아스의 친구가 되길 간절히 원했습니다. 제 목숨을 걸고 부탁드리오니 부디 허락해주십시오. 폐하." 왕은 어쩔 수 없이 허락했습니다.
다몬은 기쁜 마음으로 피시아스를 대신해 감옥에 갇혔습니다. 사형을 집행하는 날이 밝았습니다. 그러나 피시아스는 돌아오지 않았고 사람들은 바보 같은 다몬이 죽게 됐다며 비웃었습니다. 정오가 가까워졌습니다. 다몬이 교수대로 끌려나왔습니다. 그의 목에 밧줄이 걸리자 다몬의 친척들이 울부짖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우정을 저버린 피시아스를 욕하며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그러자 목에 밧줄을 건 다몬이 눈을 부릅뜨고 화를 냈습니다. "나의 친구 피시아스를 욕하지 마라. 당신들이 내 친구를 어찌 알겠는가." 죽음을 앞둔 다몬이 의연하게 말하자,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집행관이 고개를 돌려 왕을 바라보았습니다. 왕은 주먹을 쥐었다가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렸습니다. 집행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때 멀리서 누군가가 말(馬)을 재촉하여 달려오며 고함을 쳤습니다. 피시아스였습니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다가와 말했습니다. "제가 돌아왔습니다. 이제 다몬을 풀어주십시오. 사형수는 접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고 작별을 고했습니다. 피시아스가 말했습니다. "다몬, 나의 소중한 친구여, 저 세상에 가서도 자네를 잊지 않겠네." / "피시아스, 자네가 먼저 가는 것뿐일세. 다음 세상에서 다시 만나도 우리는 틀림없이 친구가 될 거야." 두 사람의 우정을 비웃었던 사람들 사이에서 탄식이 흘러나왔습니다.
다몬과 피시아스는 영원한 작별을 눈앞에 두고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담담하게 서로를 위로할 뿐이었습니다. 이들을 지켜보던 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큰 소리를 외쳤습니다. "피시아스의 죄를 사면해 주노라!" 왕은 그 같은 명령을 내린 뒤 나직하게 혼잣말을 했습니다. 바로 곁에 서있던 시종만이 그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 모든 것을 다 주더라도 이런 친구를 한번 사귀어보고 싶구나."
진정한 친구란, 바로 이런 사람들을 진정한 친구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피시아스와 다몬 사이의 우정을 높이 칭찬할 수 있습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서로를 확실하게 믿어주는 이 아름다운 우정이야말로 평생에 얻을 단 한 명의 친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귀한 우정도 영원히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단지 '죽음' 앞에까지일뿐 그 이상은 결코 나아갈 수 없는 '시간과 공간에 제한된 친구'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한 의로운 사람(a righteous person)을 소개합니다. 본문 19절입니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당시 유대인의 풍습에서 약혼식은 결혼을 전제하에 1년간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엄격한 규율에 의하면, 약혼한 후 결혼식전까지는 결코 동거(同居)나 부부관계는 할 수 없습니다. 만일 결혼 전에 이 규율을 어길 경우, 그것은 바로 '파혼(破婚)'(porce)입니다. 그런데, 아직 약혼식만 한 상태에서 요셉은 그의 약혼녀 마리아로부터 "임신했노라"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이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서 요셉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하여 마리아를 난처하게 만들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것은 마리아를 진심으로 신뢰하고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요셉의 이런 경우를 보고 "영적갈등"이라 합니다. 경건한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요셉처럼 "영적갈등"의 곤경에 처할 때(spiritual dilemma)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19절에서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 소개합니다. 여기서 '의로운 사람(ὁ δίκαιος=the righteous man)'이란 '경건한 사람, 기도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경건한 사람, 기도하는 사람'은 모든 문제를 기도로 풀어 나갑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 요셉은 이 문제를 놓고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것입니다.
본문 20절에 보면, "이 일을 생각할 때"란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의로운 사람이 기도하며 고민할 때"란 뜻입니다. 이 영적인 갈등을 하는 자를 하나님은 즉각 응답으로 해결해주십니다. 본문 20절 중반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성령의 음성을 듣는 순간 기도의 사람의 고민, 즉 영적갈등은 고민 끝, 행동 개시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적은 '두려움'입니다. 믿음의 적은 '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두려움과 의심을 몰아내주실 때, 우리는 '아멘'하면 되는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오늘 본문의 핵심은 "23절"에 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God is with us)" 하나님의 이름이 구약성경에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나옵니다. 그 중에 우리기도의 응답에 확신을 주시는 하나님의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약속은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한 선지자 이사야가 기록한 예언서 사 7:14절의 말씀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700년 전의 선지자의 예언은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성탄의 계절에 "기쁘다 구주 오셨네"의 찬양으로 맞이해야 할 우리 임마누엘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를 향하여 친구라 하셨습니다. 이 친구의 사랑은 죽음도 가를 수 없습니다. 굶주림이나 칼이나 그 어떤 강한 압력도 임마누엘 예수님과 우리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임마누엘 예수ㅡ 우리의 영원한 친구의 사랑을 사도바울은 롬8:35-39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우리의 영원한 친구되신 임마누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전하신 마지막 지상의 메시지입니다. 마 28:19-20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