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아주 오래 전에 상담했던 사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한 부인이 저를 찿아 와서는 남편이 바람 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부부가 다 그리스도인이었는데 아내가 남편의 일로 대단히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부인이 “제가 남편을 다 용서 했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 함께 살지는 않겠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부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매님, 미안하지만 자매님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오해하고 있고 또 용서가 무엇인지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자매님은 남편을 용서했다고 말했지만 실은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용서는 단순히 어떤 사실을 불문에 붙이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그 문제를 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혼을 하겠다는 것은 그 문제를 더 크게 만드는 것 아닙니까?
저는 그때 고린도전서 10장 13절 말씀으로 그 부인을 설득했습니다. 그 부인은 그 말씀을 암송하고 있는 열심 있는 성도였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잘못을 저지른 남편과 더 이상 함께 살고 싶지 않다고 하던 것은 서로의 감정입니다. 저는 그 부인에게 진정으로 남편을 용서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남편을 사랑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 남편을 이해하고 이전보다 더 좋은 부부 관계로 회복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지 못한다면 그 신앙에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저와 상담한 부인은 이후에 그 시련을 훌륭하게 극복하고 남편과 아주 아름다운 관계를 맺는 자리까지 나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수께 있습니다. 주님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대신해 치르신 값 비싼 대가를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은 지금도 우리와 이웃이 용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용서의 사건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탕자의 비유입니다. 탕자는 예수님 당시 유대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최악의 범죄를 저질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재산을 요구한 것도 얼토 당토 아니한 일인데 그나마 분배받은 재산을 먼 나라에 가서 다 탕진하고 돼지 치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 아들은 자기 자신에게도 치욕이지만 아버지의 명예까지 더럽히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정말 이런 아들은 없는게 백번 낳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아들을 용서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하나님이 사랑을 간직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