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5월 둘쨋 주일을 어버이주일로 지칭하며 보내고있다. 어버이날은 부모를 향한 보은과 사랑을 기리는 날로 정해져 있지만 어머니의 사랑만 두드러지게 칭송되고 아버지들의 사랑은 두루뭉술 묻혀버리기 일쑤였다. 아버지의 자리를 지켜내느라 묵묵히 가족을 등에 업고 먼 여정을 걸어왔다. 그 여정을 되돌아 볼 시점에 접어든 아버지들의 깊은 노고와 희생과 사랑이 점차 희석되어가는 듯한 안타까움이 있다. 모든 아버지들은 자상한, 친구같은, 칭찬에 인색하지 않은 아버지로 살아가려고 하지만 아버지라는 무거운 자리가 돈 벌어 오는 사람으로, 훈계만 하는 사람으로, 밤 늦게 들어오는 사람이 되어버린 비운을 안고 살아간다. 이 시대의 아빠들의 외로움과 고뇌를 눈여겨 보지 않을 수 없음은 진정한 가정의 리더십을 찾기 힘든 시대의 아픔이 있기 때문이다. 집이라는 건축물에 비유해 보더라도 아버지의 존재는 초석이요, 기둥이요 지붕이 되어왔다고 믿는다. 해서 시대앞에 뉘우침하는 마음으로 부성애의 한계없는 절대성을 새롭듯 되짚어보게 된다. 나이들어버린 부모는 병들고 나약한 대상이 아니라 공경의 대상이어야 한다. 이런 말이 있다. ‘효도 받는 것도 능력’이라는. 나이 깊어가면서 이유있는, 뜻있는 말인 것 같음을 절감하게 되더라는 것이다. 어머니의 자리는 처음부터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다. 하늘로 부터 선물 받은 본능적인 모성애 덕분에 어머니의 자리는 인류역사가 시작되면서 견고하게 자리잡았다할 수 있는 반면 아버지의 자리는 권위의식의 발로가 빚은 불이익을 일찌감치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음이다. 자녀를 바른 길로 이끌고, 바르게 살아가도록 길을 열어준다는 명분으로 본의 아니게 가부장적인 말의 폭력이 가해지고, 무리한 강요를 하게되고, 권위의식을 남용하게 된다. 그 폐해는 권위 남용으로 이어지고 종래에는 어린 자녀들에게 상처, 원망, 반항심을 조장하게 된다. 이렇게 성장한 자녀들은 성장후 세상에 나가서도 권위에 대한 반항과 도전을 감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반감이 성장후 어른이 된 후에도 후유증으로 잠재되어 인생을 흔들고 있다는 것이다.
효도받기 위한 목적으로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가 있겠는가만 공경받는 부모가 되기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존경받는 부모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음을 자녀들이 깨닫게되는 즈음이면 이미 부모는 곁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모의 삶 자체가 자녀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서 무형의 유산으로 전해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음이다. 자녀의 잘못 된 부분의 모습 속에 부모 모습이 표출되지는 않은지, 부모의 언행이 자녀의 모습 속에 언뜻언뜻 숨겨져있음을 시인해야만 한다. 또한 무조건 자녀를 힘들게 하지 않겠다는 맹목적인 목적은 버림받는 부모로 들어서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겠기에 자녀의 효도의 길을 막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하는 난제도 수긍해야만 한다. 효도의 기회를 아름답게 열어주는 것도 훗날 불효에 대한 죄책감을 미연에 씻어주는 현명한 부모가 되어주어야할 것이라서 자식의 자리도 어렵고 부모의 자리도 어렵기는 매한가지인 것. 거추장스러운 부모의 자리도 마음아픈 일이거니와 현대 고려장이란 말이 존재한다는 것 부터가 처절해지는 심정이 된다. 다양한 모습으로 노후를 보내시는 노부모님들의 심정에 부디 평안이 깃드시는 어버이날이 되시기를 기도드린다. 다행히 딸만 넷을 둔 것이 행운으로 둔갑한 시대를 살아가게 됨을 깊이 감사하게되는 어버이날을 한주간 내내 보내고 있다. 한 번도 딸만 낳은 아내를 두고 투정하지 않는 아이들 아빠가 더욱 고맙다. 행여 받을 상처며 손주 사랑을 누리지 못한 딸아이들의 상처가 덧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딸들의 울타리가 되어왔었다. 올해 어버이날은 아이들의 아빠가, 손주들의 할아버지가 더욱 돋보이는 날이다. 급변하는 시대를 건너오며 이국에서 맞게되는 위로의 날로 장려되어야 마땅하며 그 사랑을 되새길 수 있어 더욱 의의있는 날이다. 백발이된 인생노정에서 사위들이 딸들이 손주들이 축하해주는 어버이날. 부성애의 한계없는 절대성 앞에 온 가족이 합창을 한다.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래오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