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4장의 엠마오 예수는 엠마오로 가는 길목에서 만난 두 제자와의 만남에서 이루어진 부활의 사건을 두고 기록한 말씀입니다. 부활은 한 마디로 말하면 “열림”의 사건입니다. 죽음의 문, 사망의 문을 열고 새 생명의 소망을 여신 예수 그리스도의 열림의 사건입니다. 엠마오의 길은 예루살렘에서 약 7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예루살렘이 올라가는 길이라면 엠마오는 내리막길이었습니다. “글로바와 한 제자”(눅24:18), 소위 이들이 나타낸 것은 오늘 크리스천의 현주소임을 명백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의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로서, 예수님의 공생애의 절정에 해당하는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역사에 동참한 <역사의 증인>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부활”이라는 <새 생명의 열림사건>을 아직 눈과 마음으로 느끼지 못한 채, “열림”이 아니라, “닫힘” 속에 갇혀있는 <신앙의 트라우마>에서 허덕이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부활의 예수는 오늘 엠마오라는 도상에서 닫힘의 포로 된 자들을 만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동행에도 불구하고(눅24:15), 그들의 “눈, 마음, 영안(영적인 눈)”은 여전히 닫혀있음을 알게 해 주신 분은 엠마오 예수십니다. 엠마오 예수가 나타나셨으나, 그들의 눈은 닫혀있었으며, 그들의 마음 역시 닫혀 있었습니다(눅24: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24: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서더라.”) 더욱이 심각한 것은 그들의 영안마저 닫혀있었습니다(눅24: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21세기의 현대 크리스천의 심각한 영적 딜레마가 바로 엠마오의 두 제자와 공통적인 현상은 <눈>은 뜨고 있으나,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마음>은 삶을 살아가려고 온갖 애를 쓰고 있으나 정작 예수님을 향하여 열려있지 못하고, <영적인 눈>은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바라볼 수 없는 반복된 현실입니다.
“부활”은 <열림의 사건>입니다. <눈>을 열어서 예수님을 생명과 부활의 주님으로 볼 수 있어야 하고, <마음>을 열어서 슬픔에서 기쁨과 소망의 마음으로 변화되어야 하고, <영안>은 활짝 열려 있어서 부활의 예수, 엠마오 예수가 동행하심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엠마오의 두 제자처럼 예수님을 “집으로” <초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열림의 집으로, 열림의 마음으로, 열림의 영안으로 예수님을 “살아계신 생명의 왕”으로 모셔 들여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온 인류를 향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신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열림의 예수, 열림의 왕으로 맞이하는 크리스천의 지혜입니다. 그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절망과 슬픔의 포로가 아닌 절망과 슬픔의 자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엠마오 예수, 열림의 예수의 음성이 귓가에 들리게 될 것입니다.